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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아브라함계통의 종교[유대교와 기독교 이스람교]/ 종교 [불교 휜두교 유교 / 한국의 기독교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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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anada
댓글 0건 조회 612회 작성일 17-01-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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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아브라함계통의 종교[유대교와 기독교 이스람교]/ 종교 [불교 휜두교 유교 / 한국의 기독교 발자취


아브라함계통의 종교 유대교와 기독교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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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상 종교의 한 분류로, 중동지방에서 출발한 유일신교다. 이에 속하는 종교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드루즈, 만다야교, 바하이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믿는 가장 큰 종교 계통이다. 조직화된 종교들 중 이쪽 계통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합쳐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신자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역사[편집]

유대교의 경우 민족종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바빌론 유배 이후에 유대인들이 지중해 곳곳에 퍼져나가면서 유대교 역시도 퍼졌다.이미 BC 2세기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수는 옛 이스라엘 왕국 땅의 유대인 수를 넘어섰고, 이 와중에 독특한 교리로 인해[1] 꽤 많은 이방인 출신 유대교 신자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화된 유대교 공동체들을 합칠 경우, 그 절반이 유다인들이 아니었던 팔레스티나의 전체 인구보다도 많았다.[2] 즉 이 시기의 유대교는 민족 종교의 모습과 보편 종교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그렇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유대인 공동체가 '히브리어 구약'이 아닌 '그리스어 구약'을, 곧 칠십인역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 사례들도 나왔다.

그리고 서기 1세기가 되면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바로 예수의 출현이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 차츰퍼져[3] 결국 국교 자리에까지 오르고 이후 선교를 통해 전 서구세계와 중남미, 태평양, 남아프리카까지 널리 퍼진 지배적 종교가 되었고, 또한 이러한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아 중동에서 출현한 것이 바로 이슬람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역사와 지배권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4]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좀더 후에 등장한 종교는 대체로 전에 등장한 종교의 내용을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그래밍의 상속을 생각하면 편합니다 이미 있는 것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살짝 덧붙이는 게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5]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성경이 하느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인정하고, 구약의 유대교 예언자들과 위대한 인물들을(이사야, 예레미야, 다윗이나 솔로몬 등) 모두 인정하고 공경한다. 구약의 영웅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이슬람도 동일하며, 그리고 이슬람은 예수를 (구세주가 아닌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예수도 무함마드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6]

분류 이름이 이렇게 붙은 이유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일신교도가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중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기독교가 24억, 그 다음으로 많은 이슬람의 16~17억(2010년대 통계기준)이니, 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인구수가 전세계 인구(72억여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성경에 보면 신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다." 약속하는데, 오늘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들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걸 생각하면 실제로 약속이 이루어진 셈이다.

일단 두 주요 세계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둘 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이기에[7]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동아시아[8]나 인도 등 특수한 지역을 제외하고 아브라함 계통 종교(절대 다수가 기독교와 이슬람)가 인류다수의 보편 종교로 정착되리라는 의견도 있다(Pew Forum 등 공신력있는 세계 기관의 통계 예측으로만 봐도 21세기말엔 인류 70% 가까이가 기독교와 무슬림일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다). 힌두교는 인도 한정으로 킹왕짱이지만 그 외 세계에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불교는 광범위한 선교에 있어서 원활하지 못한데다가 인구증가세도 미미해 신자의 수가 계속 정체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9]

그리고 북미, 유럽의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감소세인 것은 사실이나 일부 지역들은 회복세를 보이기도 한다. 미국 바이블벨트 지역이나 폴란드, 러시아의 사례 등에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실질 신자수와 관계없이 중세 이후로 20세기 초까지 동구권을 제외한 유럽 대다수 국가와 북미 사회는 오랫동안 기독교에 동화된 상태이다.

다만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은 그들이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종교와 종파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다. 이슬람의 경우 알라가 유대교 및 기독교의 신과 완전하게 같은 신이라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고, 기독교의 경우 가톨릭은 이 부분에 긍정하지만,[10][11] 근본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아브라함 계통의 다른 분파, 특히 이슬람과의 공통점을 지적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개신교 측은 세부 종파별로, 교단별로 의견대립이나 견해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2015년 미국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이 같다고 주장한 교수가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쿠란에서는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 신도인 유대교, 기독교도를 일컫어 "성서의 백성"들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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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계통의 종교 유대교와 기독교
나무위키 3. 기타[편집
아브라함계통 종교외의 타종교 계열로는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힌두교가 포함된 인도 계통의 종교, 불교의 선종, 유교, 도교, 신토(토착종교에 가까우나 분弼 이렇다)가 포함된 도 계통의 종교가 있다. 불교의 선종은 비교종교학의 계열상으로는 불교 본체와 다르게 분류된다. 이외에 조로아스터교, 아베스타교 등이 포함된 이란 계통의 종교가 있다.


[1] 그리스 신화의 운명이나 카오스처럼 신조차 넘어설 수 없거나 신보다 선재하는 어떤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유일신 신앙, 문서화된 율법서 등
[2] 인구 관련 수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주석성경이 출처이다.
[3] 그리스도교는 명백한 실존 인물인 '나자렛 예수'를 내세웠고, 이는 당시 로마 내에서 경쟁하던 다른 종교들과 구분되는 가장 독특한 점 중 하나였다.
[4] 유대교는 서기 1세기에도 이미 보편종교의 모습이 어느정도 혼재되어있기는 했으나, 할례를 비롯한 각종 민족적 율법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5] 사실 철학들도 그렇다. 기존 대세를 까고 다시 까고를 반복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은 받아들인 상태에서 발전을 시도한다. 그러나 가끔 완전히 새로운 체계를 새우는 사상가들이 나오는데, 우리는 그들을 사상적 혁명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6] 다만 구체적으로는 예수와 무함마드는 다소 차이를 지닌다. 예수는 자신이 호소하는 사상이야말로 유대교 본연의 가치임을 주장했고, 그의 공동체를 진(眞) 이스라엘로 보았다. 반면 무함마드의 경우,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와 구분되는 정체성을 지녔었고 그렇게 불리는걸 원하지도 않았다.
[7] 기독교는 전통적인 북미나 유럽 지역에서는 움츠러들고 있으나 쇠락해가는 종교라는 많은 선진국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인구증가세나 선교율이 높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중국 등지의 나머지 지역들에서 서구의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다. 또 이슬람은 아랍과 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굉장히 높은 출산율에 힘입어 가장 빠르게 성장중이다.
[8] 사실 동아시아에서도 한국은 이미 기독교가 불교를 앞질렀고(여기서의 기독교는 천주교+ 개신교. 이 둘을 떼어놓고 보면 아직 한국 제1의 종교는 불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따지면 불교도 조계종, 태고종 등등을 구분해야 하는지라...), 중국에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9] 인도 계통의 종교가 서구권에서 성장세라는 주장이 있으나 문화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 아직까지는 한자릿수 퍼센트를 넘지 못하고 있고, 그마저도 젊은이들이 잠깐의 호기심으로 건드려보는 정도가 대다수다.
[10] 교회는 또한 무슬림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따라서 그들은 도덕 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문 中-
[11] 단 이러한 가톨릭의 교리가 가톨릭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참종교라는 절대 원칙을 포기한 건 절대 아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이슬람교 역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교리가 없는 불완전한 아브라함계 타종교일 뿐이라는 점을 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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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란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를 말한다. 종교인들은 주로 초월적인 대상, 세계에 대한 궁극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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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한국의 종교적 자유도는 세계 최상급 수준이다. 사회 분위기상 사실상 종교의 자유가 제한된 일부 국가들이나 아예 종교의 자유 ...

종교와 관련하여 그 종교에 귀의하여 우러나오는 경건한 마음은 종교심(宗敎心) · 신심(信心) · 신앙(信仰) · 불심(佛心)이라 하며, 종교적 신앙에 따르는 마음가짐은 종교의식(宗敎意識)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전례 또는 예전이라고 부르는 종교 의례(宗敎儀禮)는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을 예배하기 위한 여러 예식(Ceremonial: 의식에서의 성직자와 청중의 상징적인 행동과 시각적, 청각적인 상징) · 순서(Order: 고정된 순서) · 의식(Ritual: 말이나 노래같은 음성을 표현되는 문서화된 의식과 기도문)을 가리키며 종교 의식(宗敎儀式)이라고도 한다.
세계의 종교[편집]
인류의 종교적 발전은 평행하게 시대를 따라 흘러왔다. 아직도 고등문화 속에 남아 있는 자연민족의 신앙은 그 후에 일어난 보다 높은 종교의 막연한 근저가 되었다. 마적 외포(魔的畏怖), 무격적(巫覡的)인 신빙(神憑), 마적 열광과 황홀한 춤과 원시적 신비, 그리고 주술적이고 신성한 행사 등의 감정을 비롯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정령신앙(精靈信仰)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儀禮), 영혼숭배와 토테미즘(totemism), 요술사와 주술사, 복술·점술, 청정(淸淨)과 부정(不淨), 유치한 행위나 신성한 행위, 원시적 금욕, 공희(供犧)의 신비, 주물숭배(呪物崇拜) 등의 표상, 그리고 자연주술과 모든 자연의 주적 영화(呪的靈化) 등의 표상은 종교 이전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서서히 나타난 것에는 숭고한 신성, 신들의 숭배, 제사제도, 의례와 신전과 제사, 신성한 집단과 풍습 등의 표상이 있고, 또, 이런 표상에 속한 것으로서 신화, 우주에 관한 계도적(系圖的)인 의례의 우화(寓話), 신화적인 원시적 사변(思辨) 등이 보여주는 넓은 상상의 활동세계가 전개된다. 이런 모든 요소는 서로 매우 다르나 전혀 개별적으로 연락 없이 집합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관련하고 집결하여 하나의 그물을 이룩하고 있기도 하여, 어떤 기후나 토지에도 놀랄 만큼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유사성이 참으로 그 근본에는 통일적이고 합일적인 인간심리 일반의 기능이 있음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자연적 신앙의 뒤를 이어 선종교(先宗敎)라고 부를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으로의 전이과정이 있다. 이 전이는 서양 및 그것을 규정하는 그리스 문화에 나타났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에 이르는 중요한 기간에 신학이 신화학(神話學)으로부터, 그리고 로고스(logos)가 신화(mythos)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신들에 관한 지식을 뜻했던 신학은 점차로 신에 관한 지식이 되는 동시에 형이상학의 최고점이 되기도 했다. 신앙은 신을 마적 외포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물리학과 신비사상의 요소를 결합시킨 우주론이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크세노파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물리학은 모두 우주론적인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점점 신화적인 요소를 극복 내지 배제하고 나아가서는 신들의 세계를 신적인 것의 이념(Theion)에 종합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와 신성(神性)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신들은 그리스 비극작가(悲劇作家)들에게는 세계와 습관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힘이었으며, 본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생각에서만 의의를 갖고 있던 신이란 표현은 절대적 신성이란 이념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대적인 평행은 극동의 문화인 속에 있다. 피타고라스가 교단(敎團)을 창시한 것이 기원전 약 530년이었는데, 중국의 공자는 약 470년에 죽었고 공자와 동시대의 선배에 노자(老子)가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 시대는 이들보다 이전에 3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동양의 발전이 서양의 그것과 다른 독자성과 개별성을 보여주나 그 차이는 동일한 종속(種屬) 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얕은 신화적 단계의 극복이나 종교의 확연한 도덕화나 절대자에로의 정진(精進)이 있었다. 공자가 합리주의로 흐른 데 비해서 노자는 '도덕'으로 기울어졌다. 서양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유신론이 공자의 이론에 필적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노자의 도(道) 사상과 맞먹는다. 노자나 공자는 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플라톤에서 인정되는 내적 신비의 빛을 말했다.
이스라엘도 이 세기에 여호와의 자연신화를 깨고 유일신을 찾았다. 엘리야(Elijah)로부터 제이 이사야(Isaiah)와 에스겔(Ezekiel)에 이르는 동안 종족적 종교로부터 개인적인 주관적 종교에로의 전이(轉移)가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종교개혁 준비와 그 성과는 기원전 약 800년부터 큐로스왕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악마신앙과 다신교의 안개를 걷고 예언자적 신신앙(神信仰)과 도덕적 상반의 별견(瞥見)과 역사의 조만간의 종말에 관한 순수한 종교가 출현했다.
이 시대에 평행해서 고대인도는 혼돈된 공희(供犧)에서 바루나(Varuna) 신앙을 성립시켰다. 더욱이 우파니샤드 경전의 내용은 그리스 신학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불타(佛陀) 시대에 일어난, 일체의 잡다(雜多)는 감각의 가상(假象)이며 무지(無知)에 지나지 않지만, 진지(眞智)는 운동·변화·성질(性質) 없이 시공(時空) 이외에 '제2자가 없는 유일자(唯一者)' 위에 나타난다는 사변(思辨)은 크세노파네스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 직관에 의한 신비적 몰아(神秘的沒我)의 특유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세계에서 그 사변(思辨)과 함께 실천적 종교생활이 발전하였다. 높은 관념의 발전보다 높은 종교에 한걸음 다가섰다. 구제(救濟)·해방(解放)·해탈(解脫)의 깊은 종교적 삼매(三昧)와 금욕적 실천과 생활태도에서의 세간(世間)과 자연적 존재양식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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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기독교의 발자취
1) 기독교의 성장배경
19세기 말 조선에서 서구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시작된 이후 한국 개신교는 세계의 주목을 끌만큼 놀랍게 성장해왔다. 오늘날 4명중에서 1명은 개신교 신자일 정도로 한국 개신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왔다.

이와 같은 개신교의 성장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이런 논의들은 당시 개신교가 처해 있던 사회적 상황을 중심으로 볼 때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개신교의 성장을 이해하면 개신교 성장의 원인을 서구 선교사들이나 개신교 지도자들의 공로로 돌리는 엘리트중심주의적인 주장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개신교 자체 내에 성장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다는 주관적인 판단에 빠질 위험성도 막을 수 있다.


2) 도입기…교육과 의료를 통한 간접적 선교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개신교의 활동은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선교하기보다는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의 맥클레이(R. S. Maclay)는 고종을 만나 병원설립과 학교설립에 대한 허가를 받았다. 당시 조선정부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병원과 학교의 설립을 허가했지만, 이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1884년 9월 22일에는 중국에 있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주한미국공사 공의로 부임하였고, 1885년 4월에는 최초의 근대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이 설립되었다.

1885년 4월 5일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인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미국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인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당시 외국의 종교는 배척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의 복음을 선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직후 미국 공사에게 "우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려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어 연구생이자 교육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 아래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지금은 선교사업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어떤지요?"라는 편지를 썼다. 언더우드의 편지에는 직접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라 학교교육과 병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하려는 자세가 나타나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에 '배재학당'을 세워 최초의 근대교육의 문을 열어 놓았다. 이 학교는 1887년 6월 8일 고종이 직접 '배재'(培材)란 이름을 지어주었을 만큼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또 다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M. F. Scranton)은 1886년 5월 30일에 정동에 여학당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1887년 명성황후의 사명(賜名)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식 고등교육의 출발은 1886년 4월 29일 제중원의 의학부로 개설된 후 1899년 정식 의학교로 발전된 세브란스의학교이다. 이 학교는 최초의 의학교인 동시에 고등교육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3) 선교초기…근대 문명의 산파 역할
개신교를 통해 유입된 근대문명은 유교적 가치관과 사회질서에 묶여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난과 기근, 전염병과 문맹의 악순환에서 조선정부와 관�湧 문제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조선정부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문명을 안고 들어온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파급효과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초기의 개신교는 당시 사람들에게 종교라기보다는 근대문명의 산파로 생각되었다. 결국 개신교로 인해 도입된 근대문명은 한국사회와 문화체계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광수는 개신교에 대해서 "개신교는 어두운 한국사회에 구미의 새로운 문명을 제일 먼저 도입하여 문명개화와 자유인권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개신교는 봉건사회에서 양반에 의해 억눌렸던 상인, 천민, 여성들에게 인권, 자유와 평등의 관념을 제공했던 것이다.


4) 일제시대…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의 근원지
선교 초기의 개신교가 봉건사회를 근대문명으로 이행시키는 산파 역할을 함으로써 성장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오늘날의 개신교는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성장의 위기와 극복이라는 혼란을 겪으면서 생존력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 개신교는 민족독립과 계몽운동의 근원지였다.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개신교는 학교교육과 교회, 그리고 여러 단체를 통해 계몽활동을 전개하여 대중교육과 근대지식인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개신교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문맹률을 낮추었고,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자칫 일제하에서 상실되기 쉬운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에 기여했다.


5) 해방기…교세확장의 기회와 특권 획득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에 동조하고, 일본 정부의 통제 아래 단일한 교단으로 부속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개신교는 해방과 함께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종교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 개신교는 그 동안 계몽과 근대의 깃발을 휘두르며 전통종교와 민간신앙과 긴장관계를 형성해왔다. 많은 민간신앙을 미신과 사이비종교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전통종교가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틈을 타서 교세확장의 기회를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함께 정치사회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은 대개 기독교인들이었다.특히 이승만 정권 아래 관료와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정치와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주어진 혜택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의 예로 군대에 선교나 포교를 할 수 있는 군종제도도 주로 개신교에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6) 한국전쟁기…정신적·물질적 안정 제공
한국전쟁과 함께 월남한 북한의 교인들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웠다. 교회는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자신들의 고통과 아픔을 토로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 공간이자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고향이었다. 한국전쟁이 안겨준 사회문화적 위기는 비단 월남민의 경험만이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해당되었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던 한국인들에게 물리적·정신적 안정을 제공했던 가장 활발한 종교단체는 개신교였다. 개신교는 선교 본국으로부터 대량의 구호물자를 제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복음을 꾸준히 전파해갔다.


7) 경제개발기…경제 선장에의 편승
한국전쟁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환경을 새롭게 조성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에 걸쳐 전통적인 관습과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시작된 1960년대의 경제개발은 한국 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부터 1982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8.3%였고, 1인당 GNP는 1962년의 82달러에서 1983년의 1,884달러로 25배나 급증했다. 정부 주도형의 경제성장은 국민의 의식과 생활방식의 변화를 함께 추구했다. 전국에서 실시된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구호로 하면서, 전근대적인 속성들을 인위적으로 제거했다. 전통적인 민간신앙은 배척되었고, 가옥의 구조와 식생활의 개량이 진행되었다. 산업화와 함께 이농현상과 도시화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성에 적합했던 개신교는 자연히 경제성장의 흐름을 탈 수 있었다.


8) 1970·80년대…민주화 운동의 산실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의 인권문제와 경제적 착취, 그리고 정치권력의 부패에 대한 저항세력으로서 1970년대와 80년대에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산실 역할을 수행했다. 개신교가 지닌 이런 긍정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배경에는 자본주의 경제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물량주의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놓여 있었다.

대형화된 교회는 교단이라는 공동체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이기적 개교회주의의 모습을 띠어갔다. 개교회의 공동체만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려는 이러한 이기적 개체주의는 군사독재정치에 의한 정치불안, 도시화와 그에 따른 공동체와 소속감의 상실, 급변하는 사회현상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과 아노미(anomie) 현상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개신교 성장의 원인은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는 교회의 고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 원인을 사회적·문화적 변동에 따른 종교의 성장 혹은 후퇴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사회학적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사회학적 분석은 개신교의 성장이 정부의 주도하에서 실행된 근대화와 산업화에 개신교가 적절하게 적응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게 해 준다. 선교초기부터 근대성과 함께 전개된 개신교는 최단시간에 근대화를 추구했던 정치적·경제적 논리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교세를 확장해왔던 것이다.


2.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만남
1) 한국 문화 속의 기독교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아마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토착화'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지도 이미 한 세기를 넘겼고, 더 이상 기독교를 서구에서 들어온 외래종교라고만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기독교의 영성과 신학은 한국인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큰 흐름을 형성해왔고, 현재도 사회적 세력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전통과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지금까지 개신교가 한국 문화에 기여한 바는 극히 미미한 형편이었다.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차분히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할 시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내적 성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앞으로 개신교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풀어야 할 큰 숙제는 한국 문화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신앙과 한국의 문화가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토착화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에서 토착화의 문제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신학의 토착화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배 의식의 토착화였다. 그 각각의 추이와 성과를 살펴본다면 향후 한국 개신교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신학의 토착화
과거에도 토착화와 관련한 신학적인 논의들이 있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토착화 신학논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57년 신학 전문잡지로 창간된 《기독교사상》은 당시 한국 신학자들이 글을 발표하는 대표적인 잡지로서 신학 논의와 개신교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잡지는 이른바 '에큐메니칼' 진영의 초교파 연합기관인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되었고, 당시 진보적 신학의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토착화 논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재해석하여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를 접목시키려는 신학적 논의들이 이 잡지에 실리면서 촉발되었다. 이런 논의들은 기존의 한국 신학계가 서구 신학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던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토착화 신학이라고 불린다. 이 토착화 신학은 '비서구화'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로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윤성범(尹聖範), 유동식(柳東植), 변선환(邊鮮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과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의 결합"을 한국 신학의 과제로 설정하였다. 특히 한국의 전통 종교와 대화를 하면서 한국 종교 문화 속에서 기독교의 원형을 찾으려고 하였다. 윤성범은 고대 단군 신화와 유교 속에서, 유동식은 무교(巫敎)와 고대 풍류도(風流道) 속에서, 그리고 변선환은 선불교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내용인 창조론, 기독론, 속죄론, 구원론, 삼위일체 신론 등의 신학 구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신학의 '비서구화'에서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을 찾았던 이들은 196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주도하는 종교간 대화의 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추구하는 타종교와 대화 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이들이 동양인이면서도 서구 신학에서 출발하여 동양 종교와 문화로 접근해 들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토착화 신학은 동양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서구 기독교적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토착화 신학 논의에 대해 일군의 신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논쟁이 촉발되었다. 신학의 토착화와 한국 문화와의 만남을 주장한 신학자들이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던 반면에,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한 사람들은 주로 장로교 계통의 신학자들이었다. 특히 윤성범과 신학적 논쟁을 벌였던 박봉랑, 전경연, 이종성 등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소속이었으며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흐름에 속한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제기한 반대론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즉 토착화 신학처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할 경우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 침해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론자들은 한국이라는 특수성보다는 기독교라는 보편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토착화 신학자들과는 반대로 보편적 진리인 기독교를 통하여 한국 문화와 종교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토착화 신학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착화 신학자들은 한국의 전통 종교와 문화에서 긍정적인 가치와 기능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던 반면, 반대론자들은 그러한 노력을 오히려 기독교 전통의 보편성 유지에 쏟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3) 예배의식의 토착화
신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와 한국 문화의 만남을 모색한 것이 1960년대 토착화 신학 논쟁이었다면, 1970년대 이후 기독교 예배 형식을 토착화하려는 또 다른 논쟁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개신교 내에서 진보적인 흐름을 대변하는 기독교장로회 측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민중문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을 해오던 허병섭 목사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던 동월교회에서 문화운동가 임진택을 초청하여 판소리 선교찬송이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각색한 『안묘수전』 『허제비전』 등과 같은 창작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4년 강원룡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의 경동교회에서는 추수감사예배를 이례적으로 추석에 맞추어 민속놀이 형식을 차용하여 진행하였다. 매년 가을 11월 세번째 일요일에 지내던 한국 개신교의 전통적인 추수감사절을 추석으로 앞당겨 지낸 것이다. 이 날 밤 예배는 기존의 개신교 예배 형식이 아니라 가면극 형식을 빈 민속놀이로 진행되었다. 교회 안의 의자와 강단, 그리고 피아노 등의 집기를 다 치운 상태에서 돗자리와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예배를 시작하였다. 제1부 행사에서는 연합 성가대가 농부가, 보리타작, 풍년가 등을 부르는 민요잔치를 벌였다. 특히 제3부 대학생부 춤판에서는 서울의 양반놀이를 개조하여 당시 사회 현실을 풍자한 가면극을 선보였다. 이어 가면극이 끝나고 나서 강원룡 목사의 기도로 추석 예배를 마쳤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1985년 '한국민중선교협의회'의 결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민중교회에서도 예배의 토착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관심은 단순히 한국적인 문화 전통과 기독교를 접목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예배의 진행과정에서 민중문화의 저항적 전통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독교장로회 측의 대표적인 교회인 향린 교회의 주일 예배를 들 수 있다.

향린교회의 주일예배의 기본 형식은 죄의 고백과 용서, 성경봉독, 설교 등으로 구성되는 일반 개신교의 주일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독특한 점은 가야금, 장고, 아쟁, 대금 등을 함께 사용하여 반주하는 국악 찬송, 예복으로 한복을 사용하는 점, 성례전을 행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카스테라 빵이 아니라 전통적인 술떡을 사용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포도즙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성만찬 집기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서구식 은빛 그릇이다. 어떤 민중교회에서는 성만찬에서 시루떡과 막걸리를 사용하며, 그릇에 담긴 막걸리 위에는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빨간 꽃잎을 띄우기도 한다.

한국의 개신교가 1960년대 이후 토착화에 관심을 가지고 벌였던 신학적 논쟁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사회적으로 전통문화 계승운동이 확산되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신학의 토착화 논쟁이 당시 한국 사회의 전통문화에 대한 열기에 부응하는 것이었다면, 의례 현장에서 예배의 토착화 논쟁은 특히 전통문화를 저항문화로 이해하고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민중문화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민중교회의 사례들은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개신교의 예배 토착화 실험들은 약점을 안고 있다. 전통문화가 바탕하고 있었던 우주관이나 세계관에 대해서는 진지한 성찰을 보이지 않았고, 단지 몇 가지 상징물이나 상징적 행위, 음악이나 복식 등의 시청각적 요소들을 차용하여 예배 중에 사용求 수준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상징물의 대체가 일관적 규칙을 가지지 못할 경우에 개신교와 전통문화의 만남은 어색한 분위기로 끝나고 만다. 예컨대 향린교회의 경우에 전통적인 요소를 채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떡과 포도즙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담는 집기와 내용물이 어울리지 않는 등의 어색한 모습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점은 토착화라는 명목으로 개신교 예배에 삽입된 전통적인 요소들이 본래의 맥락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필연적으로 개신교 예배가 지닌 의미구조의 통일성도 위협받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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