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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raine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인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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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anada
댓글 0건 조회 316회 작성일 22-09-21 17:21

본문

https://www.bing.com/search?q=%EC%9A%B0%ED%81%AC%EB%9D%BC%EC%9D%B4%EB%82%98+%EC%9D%B8%EC%A2%85&qs=n&form=QBRE&sp=-1&ghc=1&pq=%EC%9A%B0%ED%81%AC%EB%9D%BC%EC%9D%B4%EB%82%98+%EC%9D%B8%EC%A2%85&sc=3-8&sk=&cvid=00ED72B749EB4CB692FFE6FC67F234AA&ghsh=0&ghacc=0&gh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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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슬라브족
우크라이나인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ці 우크라인치 [ukrɑˈjinʲtsʲi][ *])는 우크라이나 의 주요 민족이며, 동슬라브족 에 속해 있다.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폴란드, 몰도바, 벨라루스 와 슬로바키아, 발트 3국,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에 많은 수가 거주한다. 루소-우크라이나인 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말한다.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인 들과 거의 비슷함에 가깝다. 거의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제국 과 소비에트 연방 지배의 영향으로 러시아어 를 많이 이해한다. 일부는 벨라루스어 도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 거주국가 [ 편집] 우크라이나: 3800만 명
러시아: 3,269,992 (2015)
우크라이나: 37,541,693
캐나다: 1,359,655 (2016)
폴란드: 1,200,00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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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국가
우크라이나: 3800만 명
러시아: 500만 명
미국: 150만 명
캐나다: 130만 명
몰도바: 60만 명
폴란드: 30만 명
슬로바키아: 20만 명
아르헨티나: 20만 명
브라질: 20만 명
종교
거의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다. 종교에는 가톨릭교(주로 그리스 가톨릭교), 개신교를 믿는 사람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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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대
3. 중세 초
3.1. 키예프 공국
4. 중세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4.2. 리투아니아 대공국
5. 근세
5.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5.2. 코사크 헤트만국
6. 근대 :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6.1. 러시아 영내 우크라이나의 발전
6.2. 우크라이나발 대량 이민
7. 현대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7.2. 소련의 통치
7.2.1. 현대 우크라이나의 형성
7.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와 소련 붕괴
7.4. 러시아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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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대
3. 중세 초
3.1. 키예프 공국
4. 중세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4.2. 리투아니아 대공국
5. 근세
5.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5.2. 코사크 헤트만국
6. 근대 :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6.1. 러시아 영내 우크라이나의 발전
6.2. 우크라이나발 대량 이민
7. 현대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7.2. 소련의 통치
7.2.1. 현대 우크라이나의 형성
7.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와 소련 붕괴
7.4. 러시아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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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기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 쪽으로 이주하고 그 사이에 고대 슬라브족인 베네디족(웬드족), 스클라베니족, 안테스족이 게르만족의 빈자리를 점거하며 중유럽과 남유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스클라베니족은 슬라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한편 드네스트르 강과 드니프로 강 유역 및 아조프 해 연안에 이르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땅에는 얀테스족이 이주해서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 알란족, 사르마트족과 섞여 살았다. 그리고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들이 슬라브 민족과 통혼하여 혼혈화하면서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었고, 이들이 우크라이나인의 시조가 되었다. 6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는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족들은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이방인 손님들을 환대하며, 성격이 유쾌하다고 기록했다

7세기 말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은 이전에 우크라이나에 들어왔던 훈족이나 아바르족과는 다르게 일방적인 파괴와 노예화는 지양하고, 슬라브족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교역하였다. 이들의 전임자였던 아바르족들이 기회만 되면 동로마 제국에 슬라브족들을 이끌고 쳐들어갔던 것과 다르게 하자르 칸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무역 거점들을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신경을 썼다.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 연안은 200년 가까이 '팍스 하자리카'를 누렸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인들은 꿀과 밀랍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층인 아크 하자르인들은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인과 거의 동화되어 밝은 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했다.

모든 슬라브가 카간을 자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간'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던 930년경 이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하는 슬라브족들이 아랍과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었다. 노르드계 바이킹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지면서 무역, 약탈 기지들을 개척했고, 이러한 과정 중에 바이킹들의 분파인 바랑인(루스)들이 세운 루스 카간국이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거점을 옮기면서 키예프 공국이 나타났다.
3.1. 키예프 공국[편집]
류리크가 지금의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류리크 왕조를 세우고, 류리크 이후 제2대 대공에 오른 바랑인 올레그가 882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정복하고 중심지를 이 곳으로 옮겨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동슬라브 3국의 정체성이 구별되기 전에 존재했던 나라로 러시아 역사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였다. 당시 키예프 루스인들은 겨울철에 오늘날 러시아, 벨라루스에 속한 삼림 지역에서 벌목을 해서 만든 목재로 작은 배를 만들어 각기 특산물을 가지고 드니프로 강과 그 지류를 배를 타고 내려가 먼저 지류가 모이는 키예프로 집결한 후, 강을 따라 함께 흑해로 내려갔다. 키예프에서 집결했다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유는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의 약탈과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랑인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공국이 10세기 사이에 하자르 칸국을 쳐부수고, 장악하던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던 공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명군인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시절 키예프 공국의 볼로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대교를 믿은 하자르 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불가르족,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왕국[3]같은 이웃 경쟁자들과 키예프 공국을 차별화하려는 의도였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대 모라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에 선교를 하면서 만든 키릴 문자가 나중에 키예프 루스에도 도입되었다. 이 시기의 키예프 공국은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스칸디아비아와 흑해를 잇는 교역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아바스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직수입한 문물을 통해서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다. 불가리아어를 바탕으로 한 교회 슬라브어로 중세 초부터 중세 말까지 러시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나 행정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으며, 안정되지 않은 공위 계승권 문제로 잦은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앙집권은 커녕 공위 계승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공위 계승권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이 흔했고, 흑해 연안의 페체네그인, 쿠만인들과 같은 유목민들과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종종 야로슬라프 1세가 페체네그족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거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루스를 재결합할 때도 있었지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교역로가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키예프가 위치한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는 키예프 공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탁 트인 평야 지대인 특성상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기 힘든 위치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아크레, 야파 같은 십자군 도시들과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직거래를 시작하자 흑해 무역이 쇠퇴하자, 키예프 공국은 전사집단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쇠락한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자마자 키예프를 비롯한 도시 대부분이 말 그대로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50만명 이상의 루스인들이 몽골인의 침략 과정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4] 멀리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 이외의 주요 키예프 공국 도시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4. 중세[편집]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1222~1223년부터 개시된 몽골의 침략 결과 수즈달, 리야진(랴잔), 키예프 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했다. 키예프 루스 영토였던 곳 대다수는 몽골과 튀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울한 지배기에 놓이게 되었다.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 관리들의 주요 일과 중에 하나는 세금을 늦게 내는 농민들을 거꾸로 묶어놓고 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공국의 중흥을 이끈 이반 1세의 '깔리타(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나온 배경 또한 이와 같았다.

한편, 키예프 대공국의 남서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자리잡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지방은 몽골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키예프 루스가 처참하게 무너지자 대공 다닐로는 바투 칸에게 직접 가서 굴욕을 감수하고 신종해 일단 위기를 넘겼다. 이 지역은 공후들보다는 지주들의 힘이 더 막강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고 키이우 등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가 몽골의 직할 지배를 받으면서 키예프 루스 후계 국가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이때까진 루스 세계의 변방에 있었지만 독립을 지키고 이후 힘을 길러 루스 영역의 최강국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직계로 계통이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의 이 갈리치아-볼히니아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이 루테니아 왕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5]

아직 볼히니아 공국이 키예프 루스에 속해 있던 시절인 1187년, 헝가리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다 실패했으며, 12년 후 볼히니아의 공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합병하여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일함으로써 갈라치아-볼히니아 공국이 되었다. 로만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의 요청을 받고, 튀르크계 쿠만족들과 싸워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1201년 발칸 반도에서 쿠만인들을 축출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했다. 로만은 나이 든 상태에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1205년 폴란드인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로만이 죽은 당시 큰아들 다닐로는 겨우 세 살이었고, 막내아들 바실코는 돌잡이 아기였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간섭을 받으며 다시 분열되었다.[6]

로만의 아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이웃 지역 공후들의 궁정에서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일반 루테니아인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현실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만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다닐로는 1221년부터 1264년까지 재위하며 선정을 펼쳐 볼히니아를 부흥시켰다. 1230년대가 되자 다닐로와 그의 형제들은 볼히니아를 헝가리 왕국로부터 탈환하였다. 다닐로는 세금을 감면하고 도시의 민회를 부흥시켰기에 언제나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245년 다닐로와 바실코는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갈리치아의 로스티슬라프 공을 격파하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다시 통일했다. 갈리치아로 건너간 다닐로는 리비우 시를 건설했고, 그의 동생 바실코는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 다르게 이들은 통치권을 나누고 나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파괴시켜려 들자 다닐로는 당장 무리하게 싸우는 방법 대신에 직접 가서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택했고, 이 와중에 타타르에게 향하는 로마 교황의 사절들과 합류했다. 다닐로는 루테니아인들이 가톨릭 유럽과 힘을 합쳐서 타타르인을 무찌르는 계획을 세우고, 이 와중에 1253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는다.[7] 다닐로가 왕위를 승인받은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이름은 루테니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결국 다닐로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톨릭에 대한 정교회 주민들의 반감으로 결국 교황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지만, 왕이라는 칭호와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닐로는 키예프를 몽골인들로부터 탈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타타르인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1264년 다닐로가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바실코도 형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루테니아 왕은 다닐로의 아들 레우 1세가 계승했다. 서유럽의 힘을 빌려 몽골에 대적한 아버지와 달리 레우 1세는 몽골과 친하게 지내며 서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의 지배권을 두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결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위협하고 루블린을 차지하는 등 레우 1세는 루테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301년 레우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유리 1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유리 1세의 치세 아래에서 루테니아 왕국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으나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루블린을 다시 빼앗기는 등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 1세는 7년의 짧은 치세 이후 1308년에 사망했고,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안드리와 레우 2세 형제가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형제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리투아니아와 몽골에 대적했는데 1323년 몽골과의 전쟁에서 형제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형제 모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루테니아 왕국을 다스리던 다닐로의 직계는 끊기고 말았고, 루테니아 왕국은 다시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로 분열되어 갈리치아는 루스인 보야르들이 차지하고,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공작 류바르타스가 차지했다. 일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야르 3자 간의 합의로 유리 1세의 외손자였던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가 '유리 2세'라는 이름으로 루테니아 왕에 등극했는데 1340년 유리 2세의 등극 이후 커져가는 폴란드의 영향력에 반감을 가진 보야르가 유리 2세를 독살했다. 이를 빌미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갈리치아를 침공해 1349년 전적으로 갈리치아를 합병했다. 볼히니아는 류바르타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난 이후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1392년까지 전쟁을 벌이다가 1392년 오스트루프 협정으로 갈리치아는 폴란드에,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로 분할한다는 합의를 보고 분쟁을 끝냈다.
4.2. 리투아니아 대공국[편집]
중세 가톨릭권에서는 정교회 루스인들이 사는 지역을 라틴어로 러시아라는 뜻의 루테니아라고 불렀다. 이른바 루테니아라고 불린 지역 대부분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 과정 와중에 리투아니아 영토로 흡수되었다. 당시 몽골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슬라브인들에게 공물을 부과하고, 종종 쳐들어가서 노예로 팔 생각만 하며 관리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이 틈새를 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이 지배하고 있던 과거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흑해 인근까지 타타르인들을 밀어부쳤는데 토크타미쉬 칸의 타타르군에게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저지당하기 이전까지,[8] 영토를 계속 확장시켜 나갔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북유럽부터 러시아까지 동서남북이 전부 기독교로 개종하는 와중에도 토착 다신교를 믿고 있다가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로[9]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리투아니아인들은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 일대의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해방자'를 자처하며 정교회 신도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게르만계 튜튼 기사단의 강제개종 및 체계적인 파괴나 몽골인들의 무차별적인 노예 사냥에 비교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침공으로 인한 유혈 사태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리투아니아는 루테니아 귀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였고, 이에 호응한 많은 도시들에 리투아니아군이 무혈입성했다.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1385~1386) 발트 토속 신앙을 믿던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10] 리투아니아인들이 발트 토속 신앙을 믿었을 당시에는 루테니아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과 통혼하고,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후계자를 칭하며 큰 마찰없이 잘 지냈지만, 점점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들이 이주해오고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폴란드 가톨릭화되면서 이후 일어날 커다란 불화의 씨가 뿌려진다.


동쪽에서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면서 1430년 크림 반도를 위시로한 크림 반도 일대에 타타르인들의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은 유목과 농업을 부업으로 삼고 슬라브인들이 사는 지역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11]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역할도 병행했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남부는 계속 타타르 세력의 노략질과 납치에 시달려야 했다.

15~16세기에 벌어진 크림 칸국의 침략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타타르족이 납치와 약탈만 주로 일삼으며 정착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는 많은 공백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크림 칸국의 전사들은 지주까지 싹 잡아가는 바람에 초르노젬으로 비옥한 드니프로 강 일대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해서 야생 상태로 복구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2] 코사크들은 이 공백지들에 정착하여 독자적으로 크림 타타르족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해나간다.

북쪽의 모스크바 지역은 노가이 칸국이나 크림 칸국의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의 정복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타르족의 눈치를 보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러시아가 되었다.

5. 근세[편집]
5.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편집]
이반 3세, 이반 4세 등 여러 유능한 군주들의 지도하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과 충돌하여 국경 분쟁을 벌이고, 타타르인들과 싸워나가면서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정체성을 세운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상황이 많이 달랐다. 1569년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해 루블린 조약을 통해 동군연합 관계에 있었던 폴란드 왕국과 연방을 이루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나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폴란드 왕국에 반강제적으로 양도했다. 폴란드 왕국의 법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보다 농민에게 더 가혹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법에는 농노가 영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폴란드 왕국 법에 의하면 왕령지의 농민이 아닌 이상 귀족 지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지방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도시민들의 곡물 교역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귀족들은 직접 사람들을 고용해 비스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운체계를 이용해 그단스크로 곡물을 실어날랐고, 그곳에서 독일인 상인들이 곡물을 운송해 팔았다. 서유럽과의 곡물 교역에서 이득을 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군연합 시절부터 농민의 토지소유를 금지시키고 귀족 소유 장원에 긴박시키는 조치를 잇따라 발표했다. 귀족의 지배를 뿌리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의 변방으로 달아난 농민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전신인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된다.
루블린 연합 이후 이 지역에서 발생한 변화는 스텝 변경 지방 식민지화의 가장 중요한 추진자들이 볼히니아 공후들을 도와주었다. 폴란드 왕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유지되는 폴란드 왕 소속으로 소규모의 이동성이 좋은 상비군은 타타르의 공격을 물리치고 스텝 지역에 계속 농민들이 정착하는 것을 독려했다. 스텝 변경 지역의 식민화에 또 하나의 자극이 된 것은 발트 지역 교역에 이 지방이 포함된 것이었다. 유럽 시장에서 곡물 수요가 계속 늘어나면서 우크라이나는 장차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리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 시절 이후 우크라이나 곡물이 유럽 시장에 나타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농민들은 정부 중심지에 가까운 농지의 농노제를 피해 이 지역으로 대량으로 이주해왔다. 이 지역에서 공후와 귀족들은 새 정착자들이 지주를 위한 의무노역과 상당 기간 동안 공납을 면제해주자 농민들이 우크라이나 스텝 변경 지방으로 계속 이주해 왔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이들은 스텝 지역에 정착해 농지를 개발해야 했다.

동쪽으로의 이주 물결은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경제, 문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보수적 추정치에 따라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숫자는 4,000명에서 열 배 이상인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시나고그를 건설하며,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새 기회는 대가 없이 얻어지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은 서로 상반되는 이익을 가진 두 집단인 지주와 농민 사이에 끼게 되었다. 원래 두 집단은 모두 정교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이 되자 많은 공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귀족들이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면서 유대인은 불만에 찬 정교도 농노들과 돈에 둔 먼 가톨릭 지주들 사이에 휘말렸음을 알았다. 이것은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원래 자포로제 코사크는 14세기부터 존재했지만 가혹한 농노제를 피해 달아난 농민들, 그리고 귀족을 포함한 다른 사회집단 출신의 이탈자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숫자가 불어났다. 처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하며 동남부 국경지대를 타타르로부터 수호하던[13] 코사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종교 및 경제적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14]

시간이 지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사크 및 정교도 집단의 갈등은 경제적 성격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다분히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많은 독일인과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지방에 마름 혹은 잡상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정교회 신도들은 특히 야만인 취급을 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차별을 하여 종교 분쟁을 일으켰다. 정교회 신도들은 법원에서도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정교회 사회의 지도층은 가톨릭 귀족들의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하나둘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여기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 지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 마름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정교도 집단간의 갈등은 단순히 계급적, 경제적 갈등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내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코사크들이 폴란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는 언제나 광범위한 유대인 학살이 동반되곤 했다.[15]

원래 우크라이나 지방 도시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정교도들은 시간이 갈수록 폴란드인 귀족이나 유대인, 독일인 등이 도시에 유입되면서 입지가 점점 축소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계속 정교회 신도들의 입지가 추락하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 정교도는 1570년대 리투아니아의 아카데미를 본 딴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당시 세워진 학교들은 슬라브어-그리스어-라틴어로 교육했기 때문에 "그리스 학교" 혹은 "그리스-슬라브 학교"라고 불렸다. 그리스-슬라브 학교들은 교수진의 부족으로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동유럽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남기는데 성공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580년에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슬라브어로 된 성경 완역본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을 얼마나 차별했는지에 관련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 네덜란드와 더불어 개인까지는 아니지만 정치 참여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의 최소 단위인 귀족마다 성문화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나라였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침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타타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공백지가 된 우크라이나 일대에 투기성 지주가 된 비시니오비에츠키, 자모이스키, 코드키에비츠 같은 거대 귀족 가문들이 주도한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도 오스트로그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오히려 정교회 신앙 보존에 치중하면서도 세력, 권력 등은 하등 꿀릴게 없는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정교회를 의식적으로 차별했다기보단 반종교개혁 시대의 조류에 따라 귀족 가문들 사이의 최고 교육 기관이 예수회 학교들이 되었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정교도들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 맞서 정교도들도 자체적으로 몽골-타타르에게 얻어 맞고 리투아니아에게 종속화되면서 자신들이 정신못차릴 사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서방 기독교의 제도적 우위를 카피하려고 했고, 이런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했던 정교도들의 노력의 결산이 17세기 중반 신학자 페트로 모힐라(Петро Могила) 주도하의 키예프 총대주교좌 복구와 훗날 키예프-모힐라 아카데미의 전신이 된 키예프 신학교 설립이었다.[16]

정리하자면 당시 우크라이나 정교회권 사회로의 가톨릭 폴란드 침투는 1차원적인 식민지, 억압자의 구도가 아니라 이런 변화 자체가 가능하게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미묘한 정교 관계의 틀에서 봐야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는 계급간 차이가 강했지만 적어도 귀족 계급 내에선 동네 쩌리 잔반에서 나라 전반을 뒤흔들 대귀족까지 평등하게 시민권과 참정권을 누렸고, 이런 귀족 공화국의 시민권 중에는 종교의 자유도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성문화된 참정권을 누리는 지배 계층만에게 한정된 종교의 자유는 16세기 아우크스부르크 합의 이후에도 옆나라 신성 로마 제국에서 결국 무너졌듯이 실제 적용의 영역에서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출신 귀족들의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어도, 가톨릭계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막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피지배계층이 다수였던 현지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바르샤바, 빌뉴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자신들은 핍박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면 이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종교적 자유 덕분에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버티겠다는 정교회 귀족층은 나름 위기의식을 느껴 경쟁적 모방에서 신학교 신설까지 적극적으로 정교회권의 반격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코사크 반란을 일으켰을 땐 이런 정교회의 이념적, 교회 조직적 재정비가 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동슬라브 루스 민족의 정교회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니, 일시적인 처우나 자치권, 봉급 문제로 빨리 반란을 일으켜 빨리 진압되었던 이전 시대의 코사크 반란과는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 우크라이나를 반쪽으로 쪼개버리고, 연방 자체에도 동유럽의 패자 위상을 상실케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힌 동유럽판 30년 전쟁이라 부를만한 규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일명 대홍수).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때 상실한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분할되어 멸망했다.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자카르파탸)[17]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2. 코사크 헤트만국[편집]
코사크는 흑해와 육로를 통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던 그 영광스러운 루스인과 동일한 민족이며, 야벳의 자손들[18]이다. 이들은 루스 군주인 올렉 공 시절 모녹실라 배를 타고 항해하며, 바퀴가 달린 배를 이용해 해로와 육로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던 바로 그 군단과 같은 가문 출신이다. 바로 이들이 루스의 신성한 군주 볼로디미르 대공 시절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를 정복했다. 이들의 조상은 볼로디미르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6세기 키예프 시의 형제단과 정교회 성직자들이 코사크의 지원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남긴 명문

폴란드인 귀족들과 루테니아인 농노들 사이의 종교 갈등은 폴란드에 재앙을 불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루테니아 지역의 영토를 잃어버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정교회 탄압과 이에 따른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반란 그리고 뒤이은 루스 차르국의 개입이었다.(대홍수 참조) 원래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들은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폴란드 본토까지 보호해주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한 대가로 반 독립적인 자치를 누렸고, 코사크가 아니었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농노들도 타타르인들에게 납치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 것이 나을거라는 체념하에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시대착오적인 가톨릭 강요 및 착취와 폭정이 이어지자 1648년 코사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 대신에[19] 그동안 대립하던 사이였던 크림 칸국과 손을 잡고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부 영토 전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폴란드는 군대를 재정비해 반격에 나서는 와중에 처음에 흐멜니츠키를 지원하는 듯 했던 크림 칸국이 코사크들을 배신하였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흐멜니츠키는 코사크들의 숙적에 해당하는 크림 칸국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고, 대신 크림 칸국을 번국으로 참고 있는 오스만 제국 측에 접근하여,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원을 조건으로 흐멜니츠키가 직접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신종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코사크 지원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흐멜니츠키를 직접 도와주는 대신에 크림 칸국 측에 흐멜니츠키를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들은 코사크가 폴란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이 전쟁이 가능한 오래 끌기를 바라고 있었다. 크림 칸은 흐멜니츠키가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것을 돕지 않는 대신 폴란드 왕과 강화협상을 벌였다. 1651년 여름 볼히니아의 베레스테츠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림 타타르군은 처음에는 코사크 편에서 참전하다가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장을 떠났고, 이 틈을 노린 폴란드군이 코사크군 핵심 부대를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수세에 몰린 흐멜니츠키는 '신종'을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지원을 요청했고[20],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 가톨릭의 압제로부터 정교도들을 해방시킨다'라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으로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스웨덴 제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등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노리고 개입하면서 규모가 몇 배로 커져 이른바 '대홍수'로 불리는 전쟁으로 번져나갔다. 흐멜니츠키가 급사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온갖 세력이 뒤엉킨 전쟁터가 되었고 흐멜니츠키 봉기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키예프는 처음 협상과는 다르게 결국 러시아로 넘어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상실하고, 동시에 곡물을 수출하던 비스와 강 수운 체계가 박살나면서 국부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이후 크림 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남부를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10여 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동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가톨릭과 이교도 타타르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다.

Cossacks osprey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된 루스 차르국의 지도자들은 코사크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표트르 대제는 코사크들을 징발하여 신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험한 노역과 군역을 강제했는데, 요새 건설 등에 동원되었던 코사크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온 관리들이 밥도 잘 안주는 주제에 마구 때리고 갈궈서 대게 2/3에서 1/6 정도가 파견나간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마제파가 칼 12세를 믿고서 대북방전쟁때 스웨덴 제국편으로 참전하여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21][22]

러시아 제국의 통치하에서 키예프 루스의 후손들이 몽골의 침략 이후 수백년만에 다시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동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크림 칸국의 침략과 폴란드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주었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당연히 러시아어를 쓸 일도 없었고, 서구식 민족주의를 배우며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보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가장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언어적 요인뿐만 아니라 종교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데,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었던 리비우 형제단이 신경이 쓰이자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 정교회 신자들이 하나로 모여 폴란드 가톨릭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만들었다. 일부러 리비우 시의 정교회 신자들 중 일부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리비우 시내에서 다 쫒아내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거기에 폴란드는 브레스트 연합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교회를, 전례는 정교회 양식이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등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재편하여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의 지배 아래로 귀속시켜 루테니아인들을 종교 문제로 서로 다투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서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려 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 영내의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는데 1676년 폴란드 의회는 정교회 신도들이 국외로 이주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이주해 오는 것, 총대주교들과 교섭하여 종교적 문제의 결정권을 넘기는 것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사형이나 재산 몰수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폴란드 귀족들은 정교회 성직자 상당수를 압박하고 포섭한 것을 기반으로 1708년을 전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 정교회는 동방 가톨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고, 영내 남아있는 정교회 신도들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로, 즉 명목상이나마 전부 동방 가톨릭 교파들로 개종시켰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는 정교회 전례만 유지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교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뿌리박게 되었다.[23]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의 돈 코사크들을 삽질만 시킨 건 아니었다. 제국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튀르크, 몽골, 퉁구스계 국가들을 정복하는데도 코사크들을 적극 활용하여 시베리아를 향해 넓은 영토를 단기간 내에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시베리아와 쿠반 강에 있는 코사크인들의 정착지는 아직도 옐로우 우크라이나, 그린 우크라이나 등 우크라이나 출신 이산민들이 주로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6. 근대 :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편집]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멸망시키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이 3차례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의 서남부 5주, 자카르파탸 일대[24]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 지역을 차지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동부의 코사크들은 러시아 제국의 정예 기병대가 되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코사크 기병들은 카프카스와 투르키스탄, 시베리아 일대의 병영 도시에 이주 정착하게 된다.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일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방임 아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로 민속 문학을 수집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간을 만들고 있었다. 중세 폴란드 시절 교역의 중심지였던 리비우 시에는 리비우 형제단이라는 우크라이나인 상공인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어 인쇄물을 발간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였다. 리비우 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 역할을 이어나갔다.

정작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의 처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가톨릭 교회임에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라틴 전례를 따르지 않는 이단이라면서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했으며 폴란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모조리 쓸려나간 러시아의 폴란드인 지주들과 달리 갈리치아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예전과 다를바 없이 이들을 착취했다. 그들을 착취하는 폴란드인 지주들과 빚으로 옭아매어 얼마 없는 땅까지 뺏어가는 유대인 대금업자들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오는 엄청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척박한 토지에 과도한 인구, 거의 없다시피한 교육 수준, 원시적인 수준의 영농 기술,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지주들과 오스트리아 당국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기근과 영양결핍과 열약한 환경으로 인해 만연한 질병, 또다시 그로 인해 저하된 농업 생산성이 다시 기근을 불러일으키는 등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곳으로 대영제국한테 쥐어짜이는 그 아일랜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갈리치아의 폴란드계 유력인사였던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노프스키(Stanisław Sczepanowski)는 갈리치아의 현실을 고발한 자신의 저서에 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음식은 절반 밖에 못 먹으며 일은 1/4 밖에 하지 못 한다고 기록을 남겼고 결국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리비우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나 오스트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 멀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브라질 등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차별한 건 아니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그나마 직접적인 탄압이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로 피신하여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지방의 경제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이 장악당하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기근과 과잉 인구에 시달리며 리비우 시에 빈민가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빈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이 없어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사상을 키워나갔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이주해오고 러시아식 농노제와 군사 문화가 뿌리내리는 동안,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인, 유대인, 독일인들과 영향을 키배로 주고받으며 서유럽과 중부유럽의 사상과 문화가 급속도로 뿌리내렸다.
6.1. 러시아 영내 우크라이나의 발전[편집]
러시아 정부의 검열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 러시아 제국 영내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완전히 사멸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러시아인 귀족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농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역사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스토마로프(1814~1870)를 들 수 있다. 19세기 우크라이나 문화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하르키우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러시아 제국 정부가 신설한 키이우 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되었다. 코스토마로프는 1847년 타라스 셰우첸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같이 유형을 갔다왔던 셰우첸코는 유형 이후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코스토마로프는 학계로 복귀하는데 성공하였고 186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기면서, 남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과 북부 러시아인(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그가 저술한 보흐단 흐멜니츠키 전기 및 자포로제 코사크에 대한 연구 덕분에 재차 유형에 처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드네프로 강 유역 흑토지대는 토양이 무척 비옥했기 때문에 여타 척박한 러시아의 다른 지방들과는 다르게 소출이 많았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잉여 식량을 영국으로 수출한 후 그 돈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귀족들이 좋아하는 위스키와 맥주, 여타 사치품을 직수했다. 19세기 당시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곡물 외에도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지역에 영국 자본의 투자를 받아 생산하는 광업, 중공업 생산품들이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19세기 후반 기준 러시아 제국 전체 수출의 3/4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책임지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오면서 특히 곡물 수송 그리고 중공업 투자가 활발했던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러시아인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19세기까지 러시아의 북부 지역의 농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중세 서유럽과 비슷한 형태로 개선되어간 반면 러시아의 영토가 된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민의 노동력을 최대한 봉건적인 수단(Barschina)을 동원하여 착취하는 방향으로 악화되어 갔다. 러시아 북부 페름 등지의 경우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이 적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겨울에 직접 가구를 제작해서 판매하거나 혹은 시내에 공장에 취직하여 공장에서 받은 급여로 소작료를 대신 지불하고, 지주 귀족이 농노들의 공장 일자리를 대신 알아봐서 주선해주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이는 북부 지역 농민들이 남부 지역 농민들보다 문해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는 이유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서 우크라이나 지역 농민들의 평균 생활 수준은 러시아 제국 여타 지역에 비해 별반 나을 바 없었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영토 우크라이나 지역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농노해방령이 시행되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우크라이나 농부들에게는 비교적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25]
농노해방에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더군다가 비옥한 남부지방에서 농노들이 상실한 토지는 전국 평균수준(18%)을 넘어 어떤 경우에는 40% 혹은 거의 전부에 달할 정도였다. ... 해방된 농노들은 현재의 수입과 관계 없이 부과된 과중한 토지상환금을 치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체불금은 계속 누적되기만 했다. 상환금 지불이 마침내 완전 탕감, 폐지된 1905년까지 이전까지 약 40여 년의 기간동안 농노들은 해방 당시 10억 루블에 못 미치는 토지를 할당받고, 이자를 합쳐 국가에 15억 루블을 지불했다. 공식적으로 농노들은 그들의 신분이 아니라 단지 토지만을 되찾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들이 낸 지불액 속에는 손실된 농노노동에 대한 배상이 눈에 안 보이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의 역사 / 니콜라이 랴자노프스키

우크라이나 지방에 살던 농민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긴 했지만 어떻게 대응할 힘이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항의하는 대신에 애들을 무작정 덮어놓고 많이 낳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농촌 공동체 미르는 각 가정의 인원수대로 땅을 분배했는데, 이때 애가 한 명이라도 더 많으면 더 많은 비율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침략과 크림 타타르의 노략질 때문에 좀처럼 증가하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인구는 이때 비로소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6.2. 우크라이나발 대량 이민[편집]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가난한 농업 지대에 총알받이용 병력 공급 지역 즈음으로 여겼으며, 갈리치아는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치아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있을 턱도 없고 그 때문에 농업 이민을 선호한데다, 차라리 춥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폴란드계나 유대계, 독일계랑 부딪힐 일이 적은 캐나다로 이민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 갈리치아 지역의 빈곤은 19세기 후반에 특히 극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들이 비옥한 흑토 지대인 것과 다르게 비교적 척박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갈리치아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식량 생산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해당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편입되고 중부-동부 지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전통적인 무역로마저 단절되었고 설상가상 별다른 공업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자 도시에서도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26]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스트리아 내 다른 지역 농민들보다 두 배 적게 먹는 대신 낙후된 농업 기술과 허약한 건강상태로 4분의 1 정도의 효율로 일하며, 농업 이외에 주 산업은 주류 양조 산업으로 농촌 내 알콜 중독이 만연하였다. 절망적이고 빈곤한 사회 분위기 속에 우크라이나계 농민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5% 정도로 당시 오스트리아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서구 세계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유명하다면 중유럽에서는 이른바 "갈리치아의 빈곤"이 기근의 대명사로 통했을 정도였다. 영양실조로 연간 5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27]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 상당수는 이웃 폴란드인 농민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대량 이민을 결정하였다. 갈리치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유럽 여타 지역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특히 캐나다로 많은 인구가 이민하였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브라질로 이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은 이민 온 지 4~5세대가 지났지만, 이른바 “콜로니”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르와 어느정도 흡사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서, 밀과 쌀, 콩을 재배해 판매하고, 이 외에도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먹던 호밀과 메밀 등을 경작한다. 이들 상당수는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재침례파 공동체 못지 않게 출산율이 높고, 또한 배타성이 강해 우크라이나계 외 다른 (로마 가톨릭을 믿는) 브라질인들을 걍 다 쵸르니(우크라이나어로 흑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사는 시골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어의 갈리치아(할리치) 방언이 많이 통용된다고 한다.[28]

오스트리아령 우크라이나에서는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해외 이민을 갔다면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대인들이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이민가는 경우가 흔했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당시 주어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대폭 축소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대신 유대인들의 이민 비자는 쉽게 내주는 편이었다.[29] 이러한 연유로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경우는 캐나다의 경우와 다르게 유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니네 동네에는 그의 아버지의 추종자들, 즉 칙칙한 옷을 입은 러시아 하시드파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관습과 인식은 그들이 버려두고 온 땅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사모바르에 차를 끓였고, 각설탕을 입에 물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먹었으며, 때로는 러시아어 때로는 이디시어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 / 체임 포톡 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지역은 근세 유대교 하시딤파의 본산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미국인들은 이들을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취급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은 포그롬을 피해 이주한 경우이니만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는 척을 진 상황이었다. 미국 유대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지만, 이들에게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
7. 현대[편집]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편집]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화에 휘말렸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오스트리아에, 나머지는 러시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1차대전에서 서로 적과 적으로 싸워야 했다.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면서 독일에게 유리하게 국경선을 내준 후 휴전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공중분해되었다.(민족자결주의 참조)

이렇게 러시아가 휘청이는 사이 우크라이나에도 다시 독립 국가가 들어설 뻔 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의 괴뢰 정부인 우크라이나국이 들어서지만 곧 독일 제국이 패망한 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공산국가는 아니다)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네스토르 마흐노가 설치한 자유지구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독립하는 그 순간부터 서우크라이나의 지배에 반발하는 폴란드인들의 봉기와, 이에 호응하여 개입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침공에 맞서 싸워야 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침공을 당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 통일을 선언했으나 수도 키예프는 2월 5일 붉은 군대에 함락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영역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남서부 일대로 축소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점령지에는 1월 6일 선포된 괴뢰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치되었다. 1919년 초 데니킨의 백군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반격을 가하자 3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반격하여 한때 키예프 인근으로 진출했지만,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을 받아 1920년 초에 이르면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일대로 영역이 쪼그라들게 된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1920년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하고 그해 5월에 키예프를 탈환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 여겼고, 폴란드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야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원래는 벨라루스 일대의 국경충돌에 불과했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정면대결하는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전쟁 끝에 러시아와 폴란드는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할했다.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한 구성국이 된다. 이 복잡한 과정은 이 링크를 참고.

이 와중에도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계속 내전을 벌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 관할 지역인 극동을 우크라이나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서 참고. 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대부분은 러시아인 정체성으로 동화됐지만, 현재도 연해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식으로 '~엔코'로 끝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랐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체를 부정하고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러시아 자국의 불가분의 일부이자 변방의 하나 생명선?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푸틴도 마찬가지. 이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에 우크라이나 지방을 부르는 이름이, 자국인 '대(大) 러시아와 대비되는 '소(小)러시아'라는 뜻인 말로로시야(Малороссия)였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말로로시야라는 단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으며 혁명, 내전, 독재, 탄압, 집단 아사,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20세기의 상처 때문에 현대에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말로로시야인'이라고 발언하는 행위는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7.2. 소련의 통치[편집]
소련 치세에서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는데,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다. 바로 1932년~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30]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반러감정의 직접적인 연원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집단농장화 정책을 펼 때 가장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는데[31] 기근의 피해가 유독 바로 그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으니, 일부러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작정하고 굶겨죽였다고 의심할 만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러시아로 이주해온 광부였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소련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로는 트로츠키,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리즈코프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한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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