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Chinese (화교) 화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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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eas Chinese (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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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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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eas Chinese (화교)
People
Overseas Chinese refers to people of Chinese birth or ethnicity who reside outside Mainland China, Hong Kong, Macau, and Taiwan. As of 2011, there were over 40.3 million overseas Chinese. Wikipedia
Canada: 1,769,195 (2016)
India: 129,740 (2011)
Singapore: 2,675,521 (2020)
Australia: 1,390,639 (2021)
Thailand: 9,392,792 (2012)
Indonesia: 2,832,510 (2010)
Japan: 922,00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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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 나무위키https://namu.wiki › 화교
3 days ago — 화교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 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
관련 사례: TWICE 쯔위 청천백일만지홍기 논란, ...
전지희 · 주현미 · 당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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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s ago — 화예는 본래는 조상이 중국인인 자손을 이르는 말로, 중화민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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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화교.
다른 나라의 화교들과는 다르게 한국의 화교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산둥성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많다. 전 세계 화교들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은 강소, 상해, 절강, 복건, 광동, 해남,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동남부 지역인데 한국에서 멀어서 이쪽 지역 출신 한국 화교는 극소수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교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광동어, 민어, 객가어인 것과 달리 재한 화교의 모어는 표준중국어이다. 지금도 인천, 평택, 군산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객선은 대부분 산동 지역 위주로 운항한다. 특히 위해, 청도, 연태 등 산동성으로 가는 항로가 많다.
산동 이외에는 직할시인 천진, 요녕 단동과 대련, 하북 진황도, 강소 연운항으로 가는 노선 뿐이다. 그리고 강소 연운항을 제외하면 산동과 문화가 비슷한 북방 지역이다.
중화민국 국적인 구 화교들이 산동, 하북, 북경 출신 위주였던 이유는 한국과 가까운 지리적 거리 때문이었고, 나중에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신화교들 역시 북방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전통적으로 강소, 상해, 절강, 복건, 광동,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동남 연해 지역은 중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쪽 지역 사람들은 이민을 가더라도 한국보다 임금 수준이 높았던 대만, 싱가포르, 서유럽, 북미,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갔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재한 화교들은 타 국가 내 화교들과 지역적 소속감이 다르다. 일단 언어만 해도 복건, 광동, 홍콩 출신들은 광동어, 민어, 객가어를 쓰는데 반해 재한 화교들은 표준중국어가 모어이다. 그래서 이들이 타 국가로 이민을 갈 때도 차이나타운에 가지 않았다.
재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또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구화교들은 국공내전 이전에 넘어온 사람들이고 냉전 시대의 국제관계로 인해 대륙에 공산국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으며 지금도 중화민국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한국 화교의 역사적 시작점은 1882년 임오군란이다. 바로 옆나라이지만 그전까지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대거 거주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군대 4천 명을 파견했는데 이들을 따라 상인 40여 명이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인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이후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6천 명이 되었고, 1923년에는 화교들이 중국에 송금한 돈이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0억 엔에 달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유출되었다.
일제는 화교들이 많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고, 조선의 화교들은 평양을 시작으로 인천·서울·부산 등지에서 200여 명이 살해당하고 폭행·강도·강간을 당하는 등 잔혹한 만행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화교들은 중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 역시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에 대한 탄압이 제일 심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다.
이로 인한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 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중식당을 운영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경제정책을 검토하면서 "화교들이 엄청난 현금을 숨겨두고 있다는 거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화교 어르신들 얘기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화폐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의 화교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한다.
사실 화교 출신 기업가들인 담철곤 오리온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과 60년 지기인 설영흥 현대차 부회장 등 화교들의 과거를 보면 외국인 취급을 받기는 했다. 당연한 게 담철곤이나 설영흥 같은 초창기 화교 세대들은 인생을 대충 봐도 정체성이 외국인이었다. 이는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로 화교와 인연이 있었던 다른 양반 출신들의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그럼에도 경제적 제약을 심하게 받았다는 썰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차별 때문에 상당수 화교들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를 해서 현재 한국인으로 간주받는다. 일단 생김새도 비슷하고 표준중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한다. 오히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이나 범죄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조선족보다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한국 화교들은 평범한 한국인들처럼 한국어가 제1언어, 즉 모어라서 언어로는 구별도 잘 안 된다. 노년층을 제외하면 대략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태어난 중장년 이하는 당연하게도 말투부터 억양까지 다른 한국인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이들 중 대다수가 중국 대륙인, 대만인, 홍콩인, 마카오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상대할 때는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요즘 시대에는 대화할 때 중국어를 섞어 쓰거나 중국어 억양이 드러나는 사람들은 대개 중국 국적의 조선족, 한족 이민자들이지 화교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화교가 얼마나 동화되었냐면 중국어도 잊어버려 화교소학에서 따로 가르쳐야 할 정도이다.
현재는 2011년 귀화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이 7만 9천 명, 중화민국 국적자는 2천 명이었다. 특히 중화민국 국적자의 경우 이중국적인 경우가 흔하다.# 귀화하지 않는 화교는 거진 이민을 택하거나 대만행을 택했다. 현재 2만 명 정도만이 중화민국 국적으로서 영주권자로 잔류해 있고 그나마 이들도 조금씩 귀화하는 중이다.
그 빈자리를 최근에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인(신화교)들과 중국 출신 조선족이 메꾸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배달부나 노가다와 같은 블루 칼라는 조선족들이 점령한 업종이 되었다.
2010년대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는 7만 명 정도로 아직 귀화하지 않은 중화민국 국적자로 점진적으로 귀화 중이다. 나머지는 본국의 실효 지배 지역인 대만 지구로 이주하거나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 갔다. 여기서 '순수 화교'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한 채 한국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중국인(신화교)들이나 조선족들은 한국 화교에 포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족들을 화교로 치면 화교들의 숫자가 크게 불어나는 중이기는 하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내 거주 중국인은 110만~120만 명인데 이 중 조선족이 60만~70만 명이다.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대만)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이다.
국부천대 이전 중화민국에서 온 경우
국부천대 이후 대만 지구에서 온 사람들
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 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하다.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계 주민들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이 순서대로 많다고 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
: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국 국적이어도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과 구별된다. 또한 기존에 3세대까지만 인정되었던 동포지위가 2019년부터 직계비속 전체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족
중국 본토 출신의 후손이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 일반적으로 한국 화교, 재한 화교라고 하면 이 부류를 뜻한다. 한국에서 대만인은 그냥 대만인, 중국인은 그냥 중국인, 중국조선족은 그냥 조선족이라고 부르지 굳이 화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호적번호가 없는 대만 여권과 한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대만인과 구별된다.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홍콩 특별행정구와 마카오 특별행정구 출신
: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여권도 따로 사용하고 해외에서 별도의 국적코드를 부여받아 중국 국적이 아닌 홍콩 국적과 마카오 국적으로 따로 구분된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타 소수민족
재한 화교들이 조선족, 중국 국적 한족들보다 수에서 밀리는 이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전통적 화교들은 상술한 것처럼 한국 국적을 취득했거나 상당수가 대만,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산동, 하북 등 북방 지역에 연고를 둔 재한 화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현재 본국의 실효지배 지역이라지만 대만은 남방 문화권에 해당하는 지역인지라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지역이다. 그래서 차라리 미국, 캐나다, 서유럽,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화교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만, 대만에 친척이 있거나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복건, 광동, 상해, 절강, 강소 출신의 화교들은 문화가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대로 대만으로 재이주하여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2. 화교, 화인, 화예의 구분[편집]
명칭
국적
해외 중국계 커뮤니티 참여
문화적 정체성[1]
화교
대만, 중국[2]
참여
대만, 중국
화인
체류국
참여
대만, 중국
화예
체류국
참여/불참
체류국
화교(華僑, Overseas Chinese) : 중국 국적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3] 대만 또는 중국과 문화와 경제 활동에 연관을 가지면서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계(漢民族系).
화인(華人, Chinese Overseas) :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본국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경우.
화예(華裔, Chinese Descendent) :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본국과 단절하고 귀화한 나라에 깊이 동화된 경우.
한국에서는 화교(華僑), 화인(華人), 화예(華裔)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화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중화권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부른다.[4]
화교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 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대만인과 그 자손을 통칭하는 말이다. 연관이라는 말은 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연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주민의 가족이나 자손이 현지에서 동향단체를 통하여 연관성을 지속하고 있음을 뜻한다.[5] 근래에는 이보다 한정적인 뜻으로 쓰여,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국적의 소유자'를 지칭하며 국적을 기준으로 화인과 구분된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에도 보통 화예를 제외한 화교와 화인만을 ‘화교’라고 부른다. 유명인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대만 국적과 유지하고 있는 여경래가 있다.
화인은 넓은 의미로는 '해외로 이주한 중국계 중 체류국 국적 취득자'를 말하며,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와 구분되는 개념이다.[6] 좁은 의미로는 국적은 체류하고 있는 나라로 귀화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본국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경우'를 말한다.[7] 예를 들면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한 당예서, 전지희가 있다. 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지만, 화교학교를 다녔거나 중국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전히 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연복, 주현미[8]가 있다. '화인'은 '화교'만큼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이민자를 통칭하여 '해외화인(Oversea Chinese)'으로 부르며, 중국 학계에서는 해외 거주 중국계를 통칭하여 '화교・화인'으로 부른다.[9]
화예는 본래는 조상이 중국인인 자손을 이르는 말로,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가장 민족적인 연계가 희박한 부류를 지칭한다. '국적도 체류하는 국가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본국과 단절하고 귀화한 나라에 깊이 동화된 경우'를 일컫는다.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혼혈 동화(混血同化)되어 이미 지연·혈연의 의식이 희박해져서 법률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도 본국과의 연관성이 약하며, 언어조차 모국어를 모르는 채 현지인화된 경우가 많다.[10] 일반적으로 선조가 5대 이상 현 거주국에 살아왔던 집안의 후예를 ‘화예’라고 칭하고 그보다 짧으면 ‘화인’으로 구분하고 있다.[11] 예를 들면 2PM의 닉쿤, (여자)아이들의 민니는 태국 국적이며 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화예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잘 하지 않아, 화예에 해당하는 사람이 유명인이 되면 이 사람은 화교다/한국인이다 라는 식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화교/화인/화예의 구분 문제만은 아니며, 한국이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성(ethnicity)과 국적(nationality)을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 크다.
3. 역사[편집]
3.1. 구한 말[편집]
화교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청나라 말기부터 식민지 대만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을 부르는 호칭이며 그 이전에 화교라는 단어는 중국 사서나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 단어이다. 가끔 예전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화교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에서 알고 있는 화교의 본격적인 시초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군이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군의 잡일을 도와주려는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에서의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화교들은 조선에서 장사를 하며 청나라 쪽으로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인 입장에서 보자면 화교들은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가 없는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다.
사실 한국 화교의 발생은 외국의 화교 집단과는 굉장히 다르다. 다른 나라의 화교들은 농지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한 복건이나 광동 출신들이 많았다.
19세기 이후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간 화교들도 서양 지역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간 나라에서 3D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대부분이 청나라군의 잡일 등을 도와주기 위해 왔다가 상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군이 되돌아갔을 때 많은 자들이 산둥성으로 돌아갔지만 남아서 상업활동을 한 자들이다.
그러다가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대한제국이 된 조선은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하여 새롭게 조약을 건다.
이 때문에 화교 상인들이 시기부터 들은 일본인 상인들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나 그 전에 잘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청나라 역시 망해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3.2. 일제 강점기[편집]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병합한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이나 자국 일본의 비단 등이었다.
1920년대 이전에는 일본 상인들의 주요 교역 물품 또한 동일했다. 영국산 면제품을 중계무역하는 것이 중국인 상인, 일본인 상인 등 외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제 무역에서 일본산 생사와 면제품 비중이 급격히 높아져서 오히려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자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일본의 이러한 관세정책은 일본 본토에서 급성장한 방직, 방적 산업을 보호하고 조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 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 300만 명 정도를 겨우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 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식 통계론 당시 화교의 인구가 9만에 달했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저렴했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외국에 돈을 벌러 왔다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조선인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 상 일본인 경영자들이 조선인보다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한테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으면서 조선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졌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 내에서 반중 바람이 거세게 불면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급속도록 좁아지고 반중 감정이 거세지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줄어든다는 측면으로 인해 일부러 이를 조장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위치한데다가 독립운동가들도 중국 국민당 등 중국 내의 정당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인과 화교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특히 조선인들과 화교 간의 갈등이나 언론을 통한 조선인-화교 대결구도 강조와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하였고, 여러번 오보사태가 터지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까지 화교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평양 한 곳에서만도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였다.
이 폭동으로 화교 약 4천 명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대다수가 중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한국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했다. 이때 한국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 무역이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되었다.
3.3. 해방 시기[편집]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은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국적(중화민국) 사람들이었던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 중부 지역 및 남부 지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한국의 화교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전쟁을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대만이나 홍콩 같은 중화권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이 많은 미국, 파독 근로자가 많은 서유럽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으면서 화교들이 무역에 유리한 점도 사라졌다.
3.4. 6.25전쟁과 1950~1980년대[편집]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 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내 거주 화교들을 모아서 SC지대를 창설한 다음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상대로 한 정보공작과 심리전, 통역업무 등에 투입하였다. 그 외에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나갔다고 하는데 반공 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국군에 입대해서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중화민국 국군에 입대해야 했다.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을 포기하고 요식업에 주력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
화교 견제 정책은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와도 부합하였으므로 이후 정권들이 계승해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외국계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진 적도 있다. 이는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타 식당도 혼분식 정책으로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혼분식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저질렀냐면 혼분식 단속원이 식당 사장딸이 먹는 밥이 흰 쌀밥인 것을 가지고 트집잡아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이 혼분식 정책은 당시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그 탓에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 캐나다에 한국 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나 생겼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중국 대사관이 있던 서울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서울 연남동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성화교학교가 있던 곳. 화교 출신 배우 하희라도 그 지역에서 자랐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각종 차별 문제에 더해 당시는 대만이 한국보다 더 잘살았기 때문에 화교들 입장에서 군대 문제 정도를 빼면 한국을 떠나도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기에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중화권 국가나 북미로 상당수가 이주하여 1990년에 2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물론 대만이 잘살았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는 엄연히 있기 때문에 대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실패한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3.5. 한중수교와 1990년대[편집]
1992년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 및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은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했다. 당시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화교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사흘 전에 공식 통보하여 부지를 빼돌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그대로 중국에 넘겨주었는데,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신사적인 편이었는데 프랑스나 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퇴거시켰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국에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신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화교들은 중국 대륙인에게 매우 부정적이다.
화교들은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다. 여기서 본인 연고가 산동이기는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보니 차라리 대만과 더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다. 특별전형으로 들어오는 수만 해도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간다. 각 학교당 몇명 수준이지만, 전국 한의대 의대 숫자를 합치면 수십 개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공상정의 아버지가 한의사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 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했는데, 민남어를 쓰는 복건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동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동동 출신들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미국 내 차이나타운 대신에 코리아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 공산당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중국인들도 있다. 당시 중국 내 기독교인들이나 지식인들도 이들과 같이 망명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이 아닌 홍콩, 싱가포르나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철저하게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았다. 자국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중국 공산당의 테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중공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한국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일부러 화교 단체와 관계를 맺지 않았으므로 화교 학교를 보낼 수 없어 자녀들도 한국인으로 키웠다. 그래서 그 중에는 본인이나 자녀들도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인터뷰에 따르면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사실은 부모가 자신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여서,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자란 자녀들이 크게 놀라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조심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 기간의 일부를 대만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 이상의 경우 모어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3.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편집]
재한 화교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며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중화민국 국적 역시 혈통주의가 우선이다보니 3세대에서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을 유지하는 사례가 많다.
최근에는 화교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자식들이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 혹은 한국 단독 국적을 가지는 사례가 증가했다. 그래서 표준중국어보다 한국어 교육에 더 신경쓴다.
굳이 화교에 한정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집단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이 소속 집단에 쉽게 동화되고, 스스로도 동화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자식을 한국인으로 키운다. 화교의 중국식 이름은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작명법이 다르고, 한국인에는 없는 중국인의 성이 많아서 티가 나는 경우도 꽤 있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이 또한 화교의 특징이라기보다 이민자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양상으로, 자민족 남성의 현지 여성과의 결혼에 대해 그 반대의 케이스보다 너그러운 경우가 민족과 국가를 막론하고 더 많다.
하지만 화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천대 때문에 그나마도 무너지는 편이라 화교 3세대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꽤 많다. 특히 통혼은 최근에 잦은 편으로 한성화교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잘 없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화민국이나 부계혈통을 따르는 편이라 화교 여자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자녀들 역시 부계주의에 따라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학교도 일반 한국 학교들에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희라와 주현미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다가 1998년 6월 14일 이후부터는 부모 양계 혈통주의 국적법으로 한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은 부계주의를 택하여 아버지가 한국인인 경우에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는 남녀차별이며 UN 국제협약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 계속 있었고, 무엇보다 미혼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못하는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자부터는 출생 당시 부모 중 어느 1명만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부모양계혈통주의로 바뀌었다.
1998년의 국적법 개정으로 이제는 출생 당시에 부모의 성별과 상관없이 부모 중 1명이 한국 국적이면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외국인 부(父) 한국인 모(母)의 자녀는 한국인 모친의 가족관계등록부(母家의 호적)에 출생신고가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외국인 아버지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자녀의 아버지 나라 외국식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등록할 수도 있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의 경우는 만 22세 전까지한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남자는 군복무를 이행하는 조건 하에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여자는 만 22세가 지나면 하나의 국적만을 선택해야 하지만, 남자는 만 22세가 지났어도 군복무 후 2년 내에 다시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추가로 주어진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는데,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화교 차별도 예전보다 제도적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IMF 이후부터는 외국인도 한국 내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새롭게 시행된 대한민국 영주권이 나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지역사회의 주민으로서 지방 참정권은 허용된다. 지방참정권은 도지사, 시장, 군수, 교육감, 시.도의원, 군의원, 지방자치단체의원장 등의 투표권이 주어진다. 물론 한국 국적이 아니므로 오직 국회의원 선거 자격은 없다.
화교 1, 2세대는 거의 완전한 중국인 정체성을 지니고 화교학교 등을 다니며 민족교육을 받아 강화된 면이 있지만,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3세대에 이르면 제1언어가 한국어가 되어버리고 한국 문화가 더 익숙하며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다만 이것은 화교나 재일교포 사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느 민족 정체성이 가장 강력한 국가의 디아스포라여도 해외에 대대로 머물러 영주하면서 3세대 이상 거주하면 언어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체류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동화되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화교 학교에서도 되도록 중국어를 쓰게 하지만 학생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화교학교에 안 다니는 화교들도 한 10% 정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화교인 줄도 모르다가 귀화하거나 성인이 된 뒤에야 알게된다.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에 동화되다보니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 중화권 중에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에 기독교인이 많다. 중화인민공화국도 각종 박해 속에 지하 교회가 늘고 있다.
특히 인천의 화교들은 상당수가 기독교를 믿는다. 인천은 국내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초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항 이후 국내 최초로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지역이고 개항과 개화기란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한국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군대에서도 외국인을 입대시키지 않는다는 점과 한국과 중화민국 다 속인주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개인에게 상당히 결단이 필요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민족주의가 한국과 중화민국의 배타성을 심화하고 억압적인 사회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었기에 양국의 청년층에게서 민족주의를 혐오하고 비판하는 시선이 커졌다. 최근에는 그래도 대다수 귀화한 화교들이 한국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귀화자는 기본적으로 면제이지만 2008년부터 희망 신청자에 한하여 병역판정검사를 받고 1~4급에 해당하는 자는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기사
사실 공무원이 되려고 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드물게 군대를 가는 사람도 있다. 특이 케이스이지만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의 이중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화교 출신 예비역 육군병장도 있었다. 이 경우 큰 문제였지만 다행히도 국적회복 제도를 통하여서 다시 한국 국적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예전엔 귀화하려면 재산이 5천만 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현재는 화교는 간이귀화 대상자로서 재산을 갖추지 않아도 귀화가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부모 중 한명과 본인이 한국에서 출생한 자, 또는 부모 중 한 명이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자. 또 군의관 3년 갔다오니 유급 2번 당했던 화교 동기가 이미 개원해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면 참으로 상콤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군필 귀화 화인의 경우 해당 없는 얘기. 어차피 이쪽이면, 특히 모계가 화교인 혼혈인 경우는 그냥 똑같은 한국 사람일 뿐이다.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에는 정책적인 차별도 있지만 교육 문제도 있다. 한국이 고도의 학벌사회로 성장하는 가운데 화교학교는 한국에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쳐서 한국 수험 과정을 밟거나 대만의 대학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일단 2020년대 기준 화교들은 모어가 한국어이고 중국어는 대만인에 비해 서툴기 때문에 대만 입시를 준비하는 건 난이도도 어렵고 해외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게 절차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화교학교 자체는 대만 입시를 준비한다.
한국 대학에 화교들 특별전형도 있으나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화교 학교 다니면서 한국 수능을 별도로 준비하긴 힘들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기 어려우니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1970년대 초반에 10만~15만에 가깝던 인구가 지금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고 해서 절반 정도로 줄은 것이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본토 산둥성 이주민 출신이므로 대만인보다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이라 할 수는 있어도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대륙 출신 유학생 무리와, 대만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의 유학생 무리 어느 쪽에도 끼지 못 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한국인과 더 가까운 사례가 많았다. 그나마 대만인 커뮤니티에 끼려고 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에 대만에서 한국으로 와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 예를 들면 한국에 유학 왔다가 아예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눌러 앉게 된 대만인 등은 본성인과 외성인을 막론하고 한국 화교 커뮤니티에 잘 끼지 못하거나 끼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낀다. 그 시절에 온 사람들이면 만날 수 있는 동족의 절대 다수가 한국 화교였다.
물론 그런 거 상관없이 잘 어울려 노는 경우도 있지만, 중화민국을 지지하면서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는 상태라면, 어느 집단에 들어가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교 2세들은 아예 본인들을 한국인으로 정의한다.
심지어 둘 다 중화민국 국적이면서도 중화민국에서 태어난 대만인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대만을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는 대만이 포함된 중국인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묘하게 정체성이 엇갈린 상황도 발생한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이나 중국 본토의 후커우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 즉 대만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을 차별한다. 그래서 이들이 대만에 가서 국민 번호를 신청한다.
중화민국 정부의 입장은 자신들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에서 하며, 자신들은 이를 개선할 것을 각국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중공의 일국양제에서 따와서 자기들에게 一本兩制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똑같은 여권이지만 타이완, 펑후, 진마 거주민과 자기들은 다른 제도를 적용한다고 한다.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 국민번호가 있는 중화민국 국적자들에만 비자를 면제해주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나뉘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캐나다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싱가포르, 한국, 아일랜드 등이 있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은 거의 다 전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는 무호적 국민이 대만 국적을 가지고, 대만 여권을 들고, 대만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무호적 국민이 대한민국 영주권 또는 F-2비자 소지시 도착비자로 발급가능하다. 대만 거주시에도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서 거주한다. 거주지가 확실하면 면제해 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중화민국 여권'에 '중화민국 대만지구 비자'가 붙어 있는, 외부인이 보기에 황당한 상황도 생긴다 그래서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90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므로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보다 한국으로 귀화한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듯하다. 본국인 대만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1년 연속 대만 거주 등 요구조건을 맞추는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대만이 징병제 국가라 군대 문제가 걸린다. #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도 중화민국의 무호적 국민이 있고 이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데, 필리핀 화교가 대만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를 한 사례도 있다. 기사 1기사 2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 이런 차별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귀국 화교도 사실은 외성인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견제가 숨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외성인들이 대다수인 화교들은 국민당 지지율이 높다. 특히 1, 2세대들. 또한 중국인 100만 명이 대한민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인(신화교)의 부모를 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제약 땜에 현재는 귀화 화인이나 혼혈들이 더 눈에 띈다. 귀화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리사 이연복과 가수 주현미, 배우 하희라와 빙속선수 공상정(특별귀화 케이스로 복수국적이다.), 기업인 담철곤 등이 있다.
4. 화교 현황[편집]
4.1. 좁은 의미의 재한화교[편집]
10만 명에 가깝던 화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70년대까지 화교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해 각종 제한을 걸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이주해 한때 2만 명까지 줄었다가 1990-2000년대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어 2010년대 귀화자를 포함한 화교 인구는 5만 명 정도이다. 이 중에 1만 3316명이 영주(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현재 화교 3세 이상을 합산하면 5~7만 명 가량이다.
서울특별시
8769명
경기도
2484명
인천광역시
2839명
부산광역시
1732명
대구광역시
871명
충청남도
647명
전라북도
585명
충청북도
569명
강원도
558명
대전광역시
514명
경상북도
432명
경상남도
358명
광주광역시
334명
제주시
295명
울산광역시
282명
전라남도
221명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과 마포구 연남동(연희동 남쪽이란 뜻)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주차 안내표시에 중국어 정체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4.2. 신화교[편집]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에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 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 명, 단기체류자 32만 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 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중국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 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중국계 인구 약 30만 명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주로 취업비자 혹은 결혼이민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입장이고 한국의 영주권 등을 취득하기 쉬운 입장은 아니기 때문에, 영주권이나 귀화를 통해 한국에 정착하는 화교나 조선족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자체적인 커뮤니티를 자발적으로 구축하기보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 및 한국에 대거 진출한 중국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3.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편집]
일본 내 중국계(대만계 포함) 주민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8.15 광복 후에는 이들의 이주가 없어졌다가 훗날 한일수교로 다시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한화교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야마토 민족 혈통인 재한일본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이들은 한국에서 짬뽕이 생겨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두산베어스의 선수 장빈(아버지가 중국계 일본인, 어머니가 한국계 일본인)이 해당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4.4. 재한 중국계 미국인[편집]
중국계 미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중국계 미국인이 한국 땅을 밟은 첫 사례는 미군정 이후로 중국계 미군 병사들이 남한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주한미군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을 제외하면 중국계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한국의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면서부터였다.
다만 한국으로 직접 이주해온 중국인의 후손들에 비하면 그 수가 적은 편이며, 일반적인 재한화교들보다 재한 미국인들과 더 잘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배우 나광훈이 이 부류에 속한다.
4.5. 재한 중국계 러시아인[편집]
중국계 러시아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소련 해체 후에 남한과 러시아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백인들 및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계 러시아인들도 남한으로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 쪽 또한 재한 러시아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강원도 영동 지방의 화교들 중에 중국계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영동 지방이 동해안을 통한 러시아 극동 지방과의 해상 교류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의 화교들 중 중화인민공화국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훈춘시 출신인 경우가 많다. 훈춘시가 두만강을 거쳐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식으로 강원도와의 수상 교류를 하기 때문이다.
4.6. 재한 동남아시아 화교[편집]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동남아시아 자체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화교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당연히 동남아시아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이들 또한 한국 내 동남아시아인 공동체에 속한 따로국밥에 가깝다. 탕준상의 아버지(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출신, 한국으로 귀화)가 이 부류에 속한다.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중인 닉쿤(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음), 민니, 뱀뱀, 크리샤 츄(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음), 태국인인 프래 또한 이 부류에 속할 수 있다.
4.7. 재한 만주족[편집]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만주족.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해온 만주족은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졌으며, 현존하는 재한 만주족은 만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 3성과 베이징 그리고 허베이성이 남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후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해당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들이다.
다만 만주족 자체가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탓에 한국 내 조선족 및 한족계 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재한 만주족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보다 한국 내 조선족들 및 동북 3성 한족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
4.8. 재한 후이족[편집]
일본의 경우 후이족 출신 화교들이 나름 좀 있어서 따로 청진 요리 식당도 여럿 차리는 데 비해 한국 기준으로 일반적인 한족계 재한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다.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에 예배보거나 아니면 둘러보러 오는 사람도 종종 있긴 한데 대부분 사업 출장 차 오는 사람들이고 재한 화교 중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내 무슬림 공동체의 주류 민족이 동남아시아계, 남아시아계, 구소련계인지라 후이족이 여기에 낄 자리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9. 남한 내 북중혼혈 탈북자[편집]
최근에는 탈북자 중에서 북한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북중혼혈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한으로 막 입국했을 당시 미성년자였던 경우이며, 일반적인 탈북자 공동체와 화교 공동체 그리고 한국인 중 어디에도 완전하게 섞이지는 못한 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5. 유명 인물[편집]
화교(중국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면서 한국에서 이민자로 체류하는 사람)과 화인(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의 구분 없이 일단 다 여기에 기재한다. 한국인이 중국, 대만 국적으로 귀화한 경우는 제외한다. 중국이나 대만은 공식적으로 귀화 제도가 없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상 중에 중국인이 있거나, 중국 혹은 대만의 국가적 이익에 부합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귀화할 수 있다.
5.1. 연예인/스포츠/기타[편집]
공상정: 1996년생 쇼트트랙 선수. 화교 3세이며, 아버지 공번기와 어머니 진신리 둘다 화교 2세다. 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16살이던 2011년에 특별귀화 신청을 인정받아 귀화하였으며, 한국과 대만 국적을 둘 다 보유한 복수국적자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서, 화교 귀화자 출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대만 빙상연맹으로부터 국가대표 제의를 받았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되었다. 특이한 건 화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한국 학교를 졸업했다.
나광훈: 1962년생 배우.
단영: 1978년생 배우.
소소경: 1979년생 前 프로야구 선수.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다녀, 규정에 따라 국내 선수로 활동하였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05년에 이원식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홍현우, 이용규였다. 은퇴후 2014년 현재 대전 유천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강래연: 1981년생 배우
손성희: 1990년생 가수.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대만 활동시 이름은 孫盛希/Shi Shi) 부모님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며 고향은 강릉시. 연세대 재학시절 밴드 동아리 "소나기" 에서 보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이기용: 1985년생 모델 겸 배우. 아버지가 화교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강심장에 출연하여 본인과 아버지 모두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하였다.
이연복: 1959년생 요리사. 중식당 목란 운영. 한국으로 귀화했다.
장채희: 김창렬의 아내.
주현미: 1961년생. 광주광역시 화교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이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출생하고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사일을 하다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화교가 아닌 한국인이다. 어린 시절에 화교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었다고 한다.#
필서진: 1989년생 가수. 대만에서는 Bii, 혹은 Bii畢書盡으로 불린다.(2013년부터 후자를 더 많이 씀) 아버지가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 어머니는 한국인인 혼혈이며 고향은 성남이다.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성남에서 화교학교가 아닌 일반 한국 초중고를 다녔다. 2006년 성남정보산업고(현 성남금융고)2학년을 중퇴, 홀로 대만으로 건너가 트레이닝을 받고(당시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2010년 대만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2012년에 해군에 입대하였고 대만 호적을 취득, 완전한 대만인이 되었다. 2013년 제대후 발표한 2집 Come back to Me의 동명 타이틀곡이 대박을 터뜨리면서서 대만 현지 소녀팬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하였다.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사작곡하며 거의가 대만 드라마 주제곡 및 삽입곡으로 쓰였다. 타이틀곡은 한글 가사가 짧게 들어가 있거나 중국어/한국어 두 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어로만 된 노래도 있으며 공연이나 시상식 등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었을 때 자신을 SM관계자라고 소개한 의문의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고 어머니에게 보여줬는데 그거 다 사기꾼이라면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희라: 1969년생 배우로 최수종과 결혼하며 귀화하였다. 아버지는 화교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짬뽕'이라 놀림당했었다고 한다.#
후인정: 1974년생 배구 선수. 1995년에 귀화해서 수원 후씨의 시조가 되었다. 역시 배구 선수, 감독 출신인 아버지 후국기와 다른 가족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적 때문에 할아버지의 반대로 한국 대표선수가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김승희: 1974년생 가수. 2014년에 데뷔하였고 대만 현지에서는 RK金承熙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으며 국적은 한국. 한국에서 10여년간 연습생 겸 보컬 트레이너로 있어서인지 대만 데뷔 앨범 홍보 영상에 티아라와 다비치 등 가수들의 축하 메시지가 있다. 대만 데뷔곡 10:10은 별에서 온 그대의 대만판 삽입곡으로 쓰임.
강육항: 1958년생 가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만으로 이민가서 가수 활동을 했다. 이문세 등 한국노래를 번안해서 부른 노래가 몇곡있다. 대만 TV를 보면 나름 인기가수 인듯하다. 대만 TV 에서 번안곡을 부를 때면 한국어 가사를 중간에 넣는 경우도 있다.
이강: 1992년생 전 축구선수. KBS2 방송 청춘 FC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2009 FIFA U-17 월드컵’의 8강 진출 멤버.(당시 대표팀 동료로는 손흥민, 김진수, 윤일록 등). 현재는 개인레슨과 아프리카 축구 방송을 하며 지도자를 준비 중.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며 중학생 때 한국으로 귀화했다.
황인덕: 1992년생 배우. 2011년 tvN 오! 보이로 데뷔해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 미남이시네요 대만판에서 강신우 역을 맡은 바 있다.
왕건명: 1993년생 축구선수. 아버지는 화교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국, 대만 복수국적이다. 대만 축구 국가대표이며, 2020년 현재 광주 FC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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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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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seas Chinese (화교)
People
Overseas Chinese refers to people of Chinese birth or ethnicity who reside outside Mainland China, Hong Kong, Macau, and Taiwan. As of 2011, there were over 40.3 million overseas Chinese. Wikipedia
Canada: 1,769,195 (2016)
India: 129,740 (2011)
Singapore: 2,675,521 (2020)
Australia: 1,390,639 (2021)
Thailand: 9,392,792 (2012)
Indonesia: 2,832,510 (2010)
Japan: 922,00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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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 나무위키https://namu.wiki › 화교
3 days ago — 화교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 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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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ays ago — 화예는 본래는 조상이 중국인인 자손을 이르는 말로, 중화민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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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화교.
다른 나라의 화교들과는 다르게 한국의 화교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산둥성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많다. 전 세계 화교들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지역은 강소, 상해, 절강, 복건, 광동, 해남,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동남부 지역인데 한국에서 멀어서 이쪽 지역 출신 한국 화교는 극소수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교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광동어, 민어, 객가어인 것과 달리 재한 화교의 모어는 표준중국어이다. 지금도 인천, 평택, 군산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객선은 대부분 산동 지역 위주로 운항한다. 특히 위해, 청도, 연태 등 산동성으로 가는 항로가 많다.
산동 이외에는 직할시인 천진, 요녕 단동과 대련, 하북 진황도, 강소 연운항으로 가는 노선 뿐이다. 그리고 강소 연운항을 제외하면 산동과 문화가 비슷한 북방 지역이다.
중화민국 국적인 구 화교들이 산동, 하북, 북경 출신 위주였던 이유는 한국과 가까운 지리적 거리 때문이었고, 나중에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신화교들 역시 북방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다.
전통적으로 강소, 상해, 절강, 복건, 광동,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동남 연해 지역은 중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쪽 지역 사람들은 이민을 가더라도 한국보다 임금 수준이 높았던 대만, 싱가포르, 서유럽, 북미,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 갔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재한 화교들은 타 국가 내 화교들과 지역적 소속감이 다르다. 일단 언어만 해도 복건, 광동, 홍콩 출신들은 광동어, 민어, 객가어를 쓰는데 반해 재한 화교들은 표준중국어가 모어이다. 그래서 이들이 타 국가로 이민을 갈 때도 차이나타운에 가지 않았다.
재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또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구화교들은 국공내전 이전에 넘어온 사람들이고 냉전 시대의 국제관계로 인해 대륙에 공산국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했으며 지금도 중화민국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한국 화교의 역사적 시작점은 1882년 임오군란이다. 바로 옆나라이지만 그전까지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대거 거주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청나라는 군대 4천 명을 파견했는데 이들을 따라 상인 40여 명이 조선에 들어와 개항장인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 화교의 시작이다. 이후 그 수는 점점 늘어나서 6천 명이 되었고, 1923년에는 화교들이 중국에 송금한 돈이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0억 엔에 달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유출되었다.
일제는 화교들이 많은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자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고, 조선의 화교들은 평양을 시작으로 인천·서울·부산 등지에서 200여 명이 살해당하고 폭행·강도·강간을 당하는 등 잔혹한 만행이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화교들은 중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 역시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고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에 대한 탄압이 제일 심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다.
이로 인한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 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 중식당을 운영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 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경제정책을 검토하면서 "화교들이 엄청난 현금을 숨겨두고 있다는 거야"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화교 어르신들 얘기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화폐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의 화교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한다.
사실 화교 출신 기업가들인 담철곤 오리온 회장이나 정주영 현대 회장과 60년 지기인 설영흥 현대차 부회장 등 화교들의 과거를 보면 외국인 취급을 받기는 했다. 당연한 게 담철곤이나 설영흥 같은 초창기 화교 세대들은 인생을 대충 봐도 정체성이 외국인이었다. 이는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로 화교와 인연이 있었던 다른 양반 출신들의 기록에서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그럼에도 경제적 제약을 심하게 받았다는 썰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차별 때문에 상당수 화교들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를 해서 현재 한국인으로 간주받는다. 일단 생김새도 비슷하고 표준중국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 구사한다. 오히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한국계 미국인, 한국계 캐나다인이나 범죄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조선족보다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한국 화교들은 평범한 한국인들처럼 한국어가 제1언어, 즉 모어라서 언어로는 구별도 잘 안 된다. 노년층을 제외하면 대략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태어난 중장년 이하는 당연하게도 말투부터 억양까지 다른 한국인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이들 중 대다수가 중국 대륙인, 대만인, 홍콩인, 마카오인, 중국계 싱가포르인들과 상대할 때는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요즘 시대에는 대화할 때 중국어를 섞어 쓰거나 중국어 억양이 드러나는 사람들은 대개 중국 국적의 조선족, 한족 이민자들이지 화교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화교가 얼마나 동화되었냐면 중국어도 잊어버려 화교소학에서 따로 가르쳐야 할 정도이다.
현재는 2011년 귀화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이 7만 9천 명, 중화민국 국적자는 2천 명이었다. 특히 중화민국 국적자의 경우 이중국적인 경우가 흔하다.# 귀화하지 않는 화교는 거진 이민을 택하거나 대만행을 택했다. 현재 2만 명 정도만이 중화민국 국적으로서 영주권자로 잔류해 있고 그나마 이들도 조금씩 귀화하는 중이다.
그 빈자리를 최근에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인(신화교)들과 중국 출신 조선족이 메꾸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배달부나 노가다와 같은 블루 칼라는 조선족들이 점령한 업종이 되었다.
2010년대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는 7만 명 정도로 아직 귀화하지 않은 중화민국 국적자로 점진적으로 귀화 중이다. 나머지는 본국의 실효 지배 지역인 대만 지구로 이주하거나 싱가포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 갔다. 여기서 '순수 화교'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한 채 한국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중국인(신화교)들이나 조선족들은 한국 화교에 포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에서 들어온 한족들을 화교로 치면 화교들의 숫자가 크게 불어나는 중이기는 하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내 거주 중국인은 110만~120만 명인데 이 중 조선족이 60만~70만 명이다.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대만)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이다.
국부천대 이전 중화민국에서 온 경우
국부천대 이후 대만 지구에서 온 사람들
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 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하다.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계 주민들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이 순서대로 많다고 볼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
: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를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국 국적이어도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과 구별된다. 또한 기존에 3세대까지만 인정되었던 동포지위가 2019년부터 직계비속 전체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한족
중국 본토 출신의 후손이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 일반적으로 한국 화교, 재한 화교라고 하면 이 부류를 뜻한다. 한국에서 대만인은 그냥 대만인, 중국인은 그냥 중국인, 중국조선족은 그냥 조선족이라고 부르지 굳이 화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호적번호가 없는 대만 여권과 한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대만인과 구별된다.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화민국 국적자
홍콩 특별행정구와 마카오 특별행정구 출신
: 중국에 반환되었지만 여권도 따로 사용하고 해외에서 별도의 국적코드를 부여받아 중국 국적이 아닌 홍콩 국적과 마카오 국적으로 따로 구분된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타 소수민족
재한 화교들이 조선족, 중국 국적 한족들보다 수에서 밀리는 이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전통적 화교들은 상술한 것처럼 한국 국적을 취득했거나 상당수가 대만,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산동, 하북 등 북방 지역에 연고를 둔 재한 화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현재 본국의 실효지배 지역이라지만 대만은 남방 문화권에 해당하는 지역인지라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지역이다. 그래서 차라리 미국, 캐나다, 서유럽,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 화교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만, 대만에 친척이 있거나 대만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복건, 광동, 상해, 절강, 강소 출신의 화교들은 문화가 어느 정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대로 대만으로 재이주하여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2. 화교, 화인, 화예의 구분[편집]
명칭
국적
해외 중국계 커뮤니티 참여
문화적 정체성[1]
화교
대만, 중국[2]
참여
대만, 중국
화인
체류국
참여
대만, 중국
화예
체류국
참여/불참
체류국
화교(華僑, Overseas Chinese) : 중국 국적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3] 대만 또는 중국과 문화와 경제 활동에 연관을 가지면서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계(漢民族系).
화인(華人, Chinese Overseas) :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본국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경우.
화예(華裔, Chinese Descendent) : 체류국의 국적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본국과 단절하고 귀화한 나라에 깊이 동화된 경우.
한국에서는 화교(華僑), 화인(華人), 화예(華裔) 등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화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중화권에서는 이를 구분하여 부른다.[4]
화교는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 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대만인과 그 자손을 통칭하는 말이다. 연관이라는 말은 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연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주민의 가족이나 자손이 현지에서 동향단체를 통하여 연관성을 지속하고 있음을 뜻한다.[5] 근래에는 이보다 한정적인 뜻으로 쓰여, '외국에 살고 있는 중국국적의 소유자'를 지칭하며 국적을 기준으로 화인과 구분된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에도 보통 화예를 제외한 화교와 화인만을 ‘화교’라고 부른다. 유명인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대만 국적과 유지하고 있는 여경래가 있다.
화인은 넓은 의미로는 '해외로 이주한 중국계 중 체류국 국적 취득자'를 말하며,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와 구분되는 개념이다.[6] 좁은 의미로는 국적은 체류하고 있는 나라로 귀화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본국과 동질성을 유지하는 경우'를 말한다.[7] 예를 들면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성인이 된 이후에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한 당예서, 전지희가 있다. 또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했지만, 화교학교를 다녔거나 중국계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전히 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연복, 주현미[8]가 있다. '화인'은 '화교'만큼이나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계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중국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이민자를 통칭하여 '해외화인(Oversea Chinese)'으로 부르며, 중국 학계에서는 해외 거주 중국계를 통칭하여 '화교・화인'으로 부른다.[9]
화예는 본래는 조상이 중국인인 자손을 이르는 말로, 중화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가장 민족적인 연계가 희박한 부류를 지칭한다. '국적도 체류하는 국가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본국과 단절하고 귀화한 나라에 깊이 동화된 경우'를 일컫는다.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혼혈 동화(混血同化)되어 이미 지연·혈연의 의식이 희박해져서 법률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도 본국과의 연관성이 약하며, 언어조차 모국어를 모르는 채 현지인화된 경우가 많다.[10] 일반적으로 선조가 5대 이상 현 거주국에 살아왔던 집안의 후예를 ‘화예’라고 칭하고 그보다 짧으면 ‘화인’으로 구분하고 있다.[11] 예를 들면 2PM의 닉쿤, (여자)아이들의 민니는 태국 국적이며 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화예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잘 하지 않아, 화예에 해당하는 사람이 유명인이 되면 이 사람은 화교다/한국인이다 라는 식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화교/화인/화예의 구분 문제만은 아니며, 한국이 단일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성(ethnicity)과 국적(nationality)을 동일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 크다.
3. 역사[편집]
3.1. 구한 말[편집]
화교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청나라 말기부터 식민지 대만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을 부르는 호칭이며 그 이전에 화교라는 단어는 중국 사서나 문헌에서 보이지 않는 단어이다. 가끔 예전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화교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에서 알고 있는 화교의 본격적인 시초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군이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군의 잡일을 도와주려는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에서의 상업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화교들은 조선에서 장사를 하며 청나라 쪽으로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인 입장에서 보자면 화교들은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가 없는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다.
사실 한국 화교의 발생은 외국의 화교 집단과는 굉장히 다르다. 다른 나라의 화교들은 농지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한 복건이나 광동 출신들이 많았다.
19세기 이후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간 화교들도 서양 지역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간 나라에서 3D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대부분이 청나라군의 잡일 등을 도와주기 위해 왔다가 상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청나라군이 되돌아갔을 때 많은 자들이 산둥성으로 돌아갔지만 남아서 상업활동을 한 자들이다.
그러다가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대한제국이 된 조선은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하여 새롭게 조약을 건다.
이 때문에 화교 상인들이 시기부터 들은 일본인 상인들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나 그 전에 잘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청나라 역시 망해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3.2. 일제 강점기[편집]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병합한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이나 자국 일본의 비단 등이었다.
1920년대 이전에는 일본 상인들의 주요 교역 물품 또한 동일했다. 영국산 면제품을 중계무역하는 것이 중국인 상인, 일본인 상인 등 외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제 무역에서 일본산 생사와 면제품 비중이 급격히 높아져서 오히려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상황이 된다.
그러자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일본의 이러한 관세정책은 일본 본토에서 급성장한 방직, 방적 산업을 보호하고 조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 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 300만 명 정도를 겨우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 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식 통계론 당시 화교의 인구가 9만에 달했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저렴했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외국에 돈을 벌러 왔다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조선인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 상 일본인 경영자들이 조선인보다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한테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으면서 조선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졌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 내에서 반중 바람이 거세게 불면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급속도록 좁아지고 반중 감정이 거세지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줄어든다는 측면으로 인해 일부러 이를 조장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위치한데다가 독립운동가들도 중국 국민당 등 중국 내의 정당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인과 화교 간의 갈등을 부추겨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특히 조선인들과 화교 간의 갈등이나 언론을 통한 조선인-화교 대결구도 강조와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하였고, 여러번 오보사태가 터지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까지 화교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평양 한 곳에서만도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였다.
이 폭동으로 화교 약 4천 명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대다수가 중국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한국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했다. 이때 한국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 무역이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되었다.
3.3. 해방 시기[편집]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은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국적(중화민국) 사람들이었던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 중부 지역 및 남부 지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한국의 화교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전쟁을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대만이나 홍콩 같은 중화권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이 많은 미국, 파독 근로자가 많은 서유럽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으면서 화교들이 무역에 유리한 점도 사라졌다.
3.4. 6.25전쟁과 1950~1980년대[편집]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 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내 거주 화교들을 모아서 SC지대를 창설한 다음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상대로 한 정보공작과 심리전, 통역업무 등에 투입하였다. 그 외에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나갔다고 하는데 반공 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국군에 입대해서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중화민국 국군에 입대해야 했다.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을 포기하고 요식업에 주력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
화교 견제 정책은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와도 부합하였으므로 이후 정권들이 계승해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외국계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진 적도 있다. 이는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타 식당도 혼분식 정책으로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혼분식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저질렀냐면 혼분식 단속원이 식당 사장딸이 먹는 밥이 흰 쌀밥인 것을 가지고 트집잡아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이 혼분식 정책은 당시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그 탓에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 캐나다에 한국 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나 생겼다.
한국은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중국 대사관이 있던 서울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서울 연남동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성화교학교가 있던 곳. 화교 출신 배우 하희라도 그 지역에서 자랐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각종 차별 문제에 더해 당시는 대만이 한국보다 더 잘살았기 때문에 화교들 입장에서 군대 문제 정도를 빼면 한국을 떠나도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기에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중화권 국가나 북미로 상당수가 이주하여 1990년에 2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물론 대만이 잘살았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는 엄연히 있기 때문에 대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실패한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3.5. 한중수교와 1990년대[편집]
1992년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 및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은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차지했다. 당시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화교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사흘 전에 공식 통보하여 부지를 빼돌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그대로 중국에 넘겨주었는데,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신사적인 편이었는데 프랑스나 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퇴거시켰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국에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신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화교들은 중국 대륙인에게 매우 부정적이다.
화교들은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다. 여기서 본인 연고가 산동이기는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보니 차라리 대만과 더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다. 특별전형으로 들어오는 수만 해도 세 자리를 훌쩍 넘어간다. 각 학교당 몇명 수준이지만, 전국 한의대 의대 숫자를 합치면 수십 개가 되기 때문이다. 당장 공상정의 아버지가 한의사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 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했는데, 민남어를 쓰는 복건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동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동동 출신들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미국 내 차이나타운 대신에 코리아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 공산당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중국인들도 있다. 당시 중국 내 기독교인들이나 지식인들도 이들과 같이 망명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이 아닌 홍콩, 싱가포르나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철저하게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았다. 자국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중국 공산당의 테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중공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한국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일부러 화교 단체와 관계를 맺지 않았으므로 화교 학교를 보낼 수 없어 자녀들도 한국인으로 키웠다. 그래서 그 중에는 본인이나 자녀들도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인터뷰에 따르면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야 사실은 부모가 자신들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여서,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자란 자녀들이 크게 놀라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조심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 기간의 일부를 대만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 이상의 경우 모어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3.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편집]
재한 화교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며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중화민국 국적 역시 혈통주의가 우선이다보니 3세대에서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을 유지하는 사례가 많다.
최근에는 화교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자식들이 한국 - 중화민국 이중국적 혹은 한국 단독 국적을 가지는 사례가 증가했다. 그래서 표준중국어보다 한국어 교육에 더 신경쓴다.
굳이 화교에 한정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집단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이 소속 집단에 쉽게 동화되고, 스스로도 동화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자식을 한국인으로 키운다. 화교의 중국식 이름은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중국인과 한국인의 작명법이 다르고, 한국인에는 없는 중국인의 성이 많아서 티가 나는 경우도 꽤 있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이 또한 화교의 특징이라기보다 이민자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양상으로, 자민족 남성의 현지 여성과의 결혼에 대해 그 반대의 케이스보다 너그러운 경우가 민족과 국가를 막론하고 더 많다.
하지만 화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 천대 때문에 그나마도 무너지는 편이라 화교 3세대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꽤 많다. 특히 통혼은 최근에 잦은 편으로 한성화교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잘 없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화민국이나 부계혈통을 따르는 편이라 화교 여자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자녀들 역시 부계주의에 따라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학교도 일반 한국 학교들에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희라와 주현미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다가 1998년 6월 14일 이후부터는 부모 양계 혈통주의 국적법으로 한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그 이전까지 한국은 부계주의를 택하여 아버지가 한국인인 경우에만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이는 남녀차별이며 UN 국제협약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 계속 있었고, 무엇보다 미혼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호적에 등록되지 못하는 등 사회 문제가 발생하여 1998년 6월 14일 이후 출생자부터는 출생 당시 부모 중 어느 1명만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부모양계혈통주의로 바뀌었다.
1998년의 국적법 개정으로 이제는 출생 당시에 부모의 성별과 상관없이 부모 중 1명이 한국 국적이면 자동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한다. 외국인 부(父) 한국인 모(母)의 자녀는 한국인 모친의 가족관계등록부(母家의 호적)에 출생신고가 된다.
이런 경우에는 한국인 어머니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외국인 아버지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혹은 자녀의 아버지 나라 외국식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등록할 수도 있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의 경우는 만 22세 전까지한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고, 남자는 군복무를 이행하는 조건 하에 복수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여자는 만 22세가 지나면 하나의 국적만을 선택해야 하지만, 남자는 만 22세가 지났어도 군복무 후 2년 내에 다시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추가로 주어진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는데,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화교 차별도 예전보다 제도적으로 많이 개선되었다. 특히 IMF 이후부터는 외국인도 한국 내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새롭게 시행된 대한민국 영주권이 나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지역사회의 주민으로서 지방 참정권은 허용된다. 지방참정권은 도지사, 시장, 군수, 교육감, 시.도의원, 군의원, 지방자치단체의원장 등의 투표권이 주어진다. 물론 한국 국적이 아니므로 오직 국회의원 선거 자격은 없다.
화교 1, 2세대는 거의 완전한 중국인 정체성을 지니고 화교학교 등을 다니며 민족교육을 받아 강화된 면이 있지만,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3세대에 이르면 제1언어가 한국어가 되어버리고 한국 문화가 더 익숙하며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다만 이것은 화교나 재일교포 사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느 민족 정체성이 가장 강력한 국가의 디아스포라여도 해외에 대대로 머물러 영주하면서 3세대 이상 거주하면 언어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체류국'의 영향을 받아 비슷하게 동화되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화교 학교에서도 되도록 중국어를 쓰게 하지만 학생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화교학교에 안 다니는 화교들도 한 10% 정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화교인 줄도 모르다가 귀화하거나 성인이 된 뒤에야 알게된다.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에 동화되다보니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 중화권 중에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에 기독교인이 많다. 중화인민공화국도 각종 박해 속에 지하 교회가 늘고 있다.
특히 인천의 화교들은 상당수가 기독교를 믿는다. 인천은 국내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초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개항 이후 국내 최초로 기독교 선교가 이뤄진 지역이고 개항과 개화기란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한국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군대에서도 외국인을 입대시키지 않는다는 점과 한국과 중화민국 다 속인주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개인에게 상당히 결단이 필요하였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민족주의가 한국과 중화민국의 배타성을 심화하고 억압적인 사회를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었기에 양국의 청년층에게서 민족주의를 혐오하고 비판하는 시선이 커졌다. 최근에는 그래도 대다수 귀화한 화교들이 한국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귀화자는 기본적으로 면제이지만 2008년부터 희망 신청자에 한하여 병역판정검사를 받고 1~4급에 해당하는 자는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대한민국에서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기사
사실 공무원이 되려고 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드물게 군대를 가는 사람도 있다. 특이 케이스이지만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의 이중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화교 출신 예비역 육군병장도 있었다. 이 경우 큰 문제였지만 다행히도 국적회복 제도를 통하여서 다시 한국 국적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예전엔 귀화하려면 재산이 5천만 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현재는 화교는 간이귀화 대상자로서 재산을 갖추지 않아도 귀화가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부모 중 한명과 본인이 한국에서 출생한 자, 또는 부모 중 한 명이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자. 또 군의관 3년 갔다오니 유급 2번 당했던 화교 동기가 이미 개원해서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면 참으로 상콤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군필 귀화 화인의 경우 해당 없는 얘기. 어차피 이쪽이면, 특히 모계가 화교인 혼혈인 경우는 그냥 똑같은 한국 사람일 뿐이다.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에는 정책적인 차별도 있지만 교육 문제도 있다. 한국이 고도의 학벌사회로 성장하는 가운데 화교학교는 한국에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쳐서 한국 수험 과정을 밟거나 대만의 대학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일단 2020년대 기준 화교들은 모어가 한국어이고 중국어는 대만인에 비해 서툴기 때문에 대만 입시를 준비하는 건 난이도도 어렵고 해외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게 절차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화교학교 자체는 대만 입시를 준비한다.
한국 대학에 화교들 특별전형도 있으나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화교 학교 다니면서 한국 수능을 별도로 준비하긴 힘들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기 어려우니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1970년대 초반에 10만~15만에 가깝던 인구가 지금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하고 해서 절반 정도로 줄은 것이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본토 산둥성 이주민 출신이므로 대만인보다는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이라 할 수는 있어도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대륙 출신 유학생 무리와, 대만 출신의 중화민국 국적의 유학생 무리 어느 쪽에도 끼지 못 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한국인과 더 가까운 사례가 많았다. 그나마 대만인 커뮤니티에 끼려고 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에 대만에서 한국으로 와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 예를 들면 한국에 유학 왔다가 아예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눌러 앉게 된 대만인 등은 본성인과 외성인을 막론하고 한국 화교 커뮤니티에 잘 끼지 못하거나 끼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낀다. 그 시절에 온 사람들이면 만날 수 있는 동족의 절대 다수가 한국 화교였다.
물론 그런 거 상관없이 잘 어울려 노는 경우도 있지만, 중화민국을 지지하면서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없는 상태라면, 어느 집단에 들어가도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교 2세들은 아예 본인들을 한국인으로 정의한다.
심지어 둘 다 중화민국 국적이면서도 중화민국에서 태어난 대만인은 중국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대만을 강조하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는 대만이 포함된 중국인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묘하게 정체성이 엇갈린 상황도 발생한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이나 중국 본토의 후커우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 즉 대만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을 차별한다. 그래서 이들이 대만에 가서 국민 번호를 신청한다.
중화민국 정부의 입장은 자신들이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에서 하며, 자신들은 이를 개선할 것을 각국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중공의 일국양제에서 따와서 자기들에게 一本兩制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똑같은 여권이지만 타이완, 펑후, 진마 거주민과 자기들은 다른 제도를 적용한다고 한다.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 국민번호가 있는 중화민국 국적자들에만 비자를 면제해주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 나뉘는데,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캐나다이며, 후자의 경우로는 싱가포르, 한국, 아일랜드 등이 있다. 그런데 주요 선진국은 거의 다 전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는 무호적 국민이 대만 국적을 가지고, 대만 여권을 들고, 대만에 들어가는 경우에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무호적 국민이 대한민국 영주권 또는 F-2비자 소지시 도착비자로 발급가능하다. 대만 거주시에도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서 거주한다. 거주지가 확실하면 면제해 주기도 한다.
어쨌거나 '중화민국 여권'에 '중화민국 대만지구 비자'가 붙어 있는, 외부인이 보기에 황당한 상황도 생긴다 그래서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90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므로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보다 한국으로 귀화한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듯하다. 본국인 대만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1년 연속 대만 거주 등 요구조건을 맞추는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대만이 징병제 국가라 군대 문제가 걸린다. #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도 중화민국의 무호적 국민이 있고 이들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데, 필리핀 화교가 대만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를 한 사례도 있다. 기사 1기사 2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 이런 차별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귀국 화교도 사실은 외성인이다. 여기에는 정치적 견제가 숨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외성인들이 대다수인 화교들은 국민당 지지율이 높다. 특히 1, 2세대들. 또한 중국인 100만 명이 대한민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인(신화교)의 부모를 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제약 땜에 현재는 귀화 화인이나 혼혈들이 더 눈에 띈다. 귀화자의 대표적인 예는 조리사 이연복과 가수 주현미, 배우 하희라와 빙속선수 공상정(특별귀화 케이스로 복수국적이다.), 기업인 담철곤 등이 있다.
4. 화교 현황[편집]
4.1. 좁은 의미의 재한화교[편집]
10만 명에 가깝던 화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부터 70년대까지 화교 경제 진출을 막기 위해 각종 제한을 걸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이주해 한때 2만 명까지 줄었다가 1990-2000년대 이후 다시 돌아오고 있어 2010년대 귀화자를 포함한 화교 인구는 5만 명 정도이다. 이 중에 1만 3316명이 영주(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현재 화교 3세 이상을 합산하면 5~7만 명 가량이다.
서울특별시
8769명
경기도
2484명
인천광역시
2839명
부산광역시
1732명
대구광역시
871명
충청남도
647명
전라북도
585명
충청북도
569명
강원도
558명
대전광역시
514명
경상북도
432명
경상남도
358명
광주광역시
334명
제주시
295명
울산광역시
282명
전라남도
221명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과 마포구 연남동(연희동 남쪽이란 뜻)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주차 안내표시에 중국어 정체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4.2. 신화교[편집]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에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 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 명, 단기체류자 32만 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 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중국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 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중국계 인구 약 30만 명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주로 취업비자 혹은 결혼이민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입장이고 한국의 영주권 등을 취득하기 쉬운 입장은 아니기 때문에, 영주권이나 귀화를 통해 한국에 정착하는 화교나 조선족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자체적인 커뮤니티를 자발적으로 구축하기보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 및 한국에 대거 진출한 중국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여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3. 재한 일본 화교·중국계 일본인[편집]
일본 내 중국계(대만계 포함) 주민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인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8.15 광복 후에는 이들의 이주가 없어졌다가 훗날 한일수교로 다시 이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한화교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며, 야마토 민족 혈통인 재한일본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이들은 한국에서 짬뽕이 생겨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두산베어스의 선수 장빈(아버지가 중국계 일본인, 어머니가 한국계 일본인)이 해당 부류로 분류될 수 있다.
4.4. 재한 중국계 미국인[편집]
중국계 미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중국계 미국인이 한국 땅을 밟은 첫 사례는 미군정 이후로 중국계 미군 병사들이 남한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주한미군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을 제외하면 중국계 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한국의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면서부터였다.
다만 한국으로 직접 이주해온 중국인의 후손들에 비하면 그 수가 적은 편이며, 일반적인 재한화교들보다 재한 미국인들과 더 잘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배우 나광훈이 이 부류에 속한다.
4.5. 재한 중국계 러시아인[편집]
중국계 러시아인이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온 케이스다. 소련 해체 후에 남한과 러시아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백인들 및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중국계 러시아인들도 남한으로 오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 쪽 또한 재한 러시아인들과 어울리는 따로국밥에 가깝다.
강원도 영동 지방의 화교들 중에 중국계 러시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많은 편이다. 이는 영동 지방이 동해안을 통한 러시아 극동 지방과의 해상 교류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지역의 화교들 중 중화인민공화국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훈춘시 출신인 경우가 많다. 훈춘시가 두만강을 거쳐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식으로 강원도와의 수상 교류를 하기 때문이다.
4.6. 재한 동남아시아 화교[편집]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동남아시아 자체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화교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당연히 동남아시아 화교가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물론 이들 또한 한국 내 동남아시아인 공동체에 속한 따로국밥에 가깝다. 탕준상의 아버지(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출신, 한국으로 귀화)가 이 부류에 속한다.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중인 닉쿤(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음), 민니, 뱀뱀, 크리샤 츄(미국 국적도 있어서 재한 중국계 미국인으로 볼 수도 있음), 태국인인 프래 또한 이 부류에 속할 수 있다.
4.7. 재한 만주족[편집]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만주족.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망명해온 만주족은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졌으며, 현존하는 재한 만주족은 만주족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 3성과 베이징 그리고 허베이성이 남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후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해당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들이다.
다만 만주족 자체가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탓에 한국 내 조선족 및 한족계 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재한 만주족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보다 한국 내 조선족들 및 동북 3성 한족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
4.8. 재한 후이족[편집]
일본의 경우 후이족 출신 화교들이 나름 좀 있어서 따로 청진 요리 식당도 여럿 차리는 데 비해 한국 기준으로 일반적인 한족계 재한화교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다.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에 예배보거나 아니면 둘러보러 오는 사람도 종종 있긴 한데 대부분 사업 출장 차 오는 사람들이고 재한 화교 중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내 무슬림 공동체의 주류 민족이 동남아시아계, 남아시아계, 구소련계인지라 후이족이 여기에 낄 자리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4.9. 남한 내 북중혼혈 탈북자[편집]
최근에는 탈북자 중에서 북한인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북중혼혈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한으로 막 입국했을 당시 미성년자였던 경우이며, 일반적인 탈북자 공동체와 화교 공동체 그리고 한국인 중 어디에도 완전하게 섞이지는 못한 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5. 유명 인물[편집]
화교(중국 또는 대만 국적을 유지하면서 한국에서 이민자로 체류하는 사람)과 화인(한국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의 구분 없이 일단 다 여기에 기재한다. 한국인이 중국, 대만 국적으로 귀화한 경우는 제외한다. 중국이나 대만은 공식적으로 귀화 제도가 없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상 중에 중국인이 있거나, 중국 혹은 대만의 국가적 이익에 부합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귀화할 수 있다.
5.1. 연예인/스포츠/기타[편집]
공상정: 1996년생 쇼트트랙 선수. 화교 3세이며, 아버지 공번기와 어머니 진신리 둘다 화교 2세다. 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16살이던 2011년에 특별귀화 신청을 인정받아 귀화하였으며, 한국과 대만 국적을 둘 다 보유한 복수국적자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서, 화교 귀화자 출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대만 빙상연맹으로부터 국가대표 제의를 받았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되었다. 특이한 건 화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한국 학교를 졸업했다.
나광훈: 1962년생 배우.
단영: 1978년생 배우.
소소경: 1979년생 前 프로야구 선수.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다녀, 규정에 따라 국내 선수로 활동하였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05년에 이원식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홍현우, 이용규였다. 은퇴후 2014년 현재 대전 유천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강래연: 1981년생 배우
손성희: 1990년생 가수.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대만 활동시 이름은 孫盛希/Shi Shi) 부모님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며 고향은 강릉시. 연세대 재학시절 밴드 동아리 "소나기" 에서 보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이기용: 1985년생 모델 겸 배우. 아버지가 화교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강심장에 출연하여 본인과 아버지 모두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하였다.
이연복: 1959년생 요리사. 중식당 목란 운영. 한국으로 귀화했다.
장채희: 김창렬의 아내.
주현미: 1961년생. 광주광역시 화교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이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출생하고 4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사일을 하다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 주현미의 친할머니 역시 화교가 아닌 한국인이다. 어린 시절에 화교라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었다고 한다.#
필서진: 1989년생 가수. 대만에서는 Bii, 혹은 Bii畢書盡으로 불린다.(2013년부터 후자를 더 많이 씀) 아버지가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 어머니는 한국인인 혼혈이며 고향은 성남이다.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성남에서 화교학교가 아닌 일반 한국 초중고를 다녔다. 2006년 성남정보산업고(현 성남금융고)2학년을 중퇴, 홀로 대만으로 건너가 트레이닝을 받고(당시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2010년 대만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2012년에 해군에 입대하였고 대만 호적을 취득, 완전한 대만인이 되었다. 2013년 제대후 발표한 2집 Come back to Me의 동명 타이틀곡이 대박을 터뜨리면서서 대만 현지 소녀팬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하였다.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사작곡하며 거의가 대만 드라마 주제곡 및 삽입곡으로 쓰였다. 타이틀곡은 한글 가사가 짧게 들어가 있거나 중국어/한국어 두 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어로만 된 노래도 있으며 공연이나 시상식 등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었을 때 자신을 SM관계자라고 소개한 의문의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고 어머니에게 보여줬는데 그거 다 사기꾼이라면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하희라: 1969년생 배우로 최수종과 결혼하며 귀화하였다. 아버지는 화교이며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짬뽕'이라 놀림당했었다고 한다.#
후인정: 1974년생 배구 선수. 1995년에 귀화해서 수원 후씨의 시조가 되었다. 역시 배구 선수, 감독 출신인 아버지 후국기와 다른 가족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적 때문에 할아버지의 반대로 한국 대표선수가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김승희: 1974년생 가수. 2014년에 데뷔하였고 대만 현지에서는 RK金承熙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으며 국적은 한국. 한국에서 10여년간 연습생 겸 보컬 트레이너로 있어서인지 대만 데뷔 앨범 홍보 영상에 티아라와 다비치 등 가수들의 축하 메시지가 있다. 대만 데뷔곡 10:10은 별에서 온 그대의 대만판 삽입곡으로 쓰임.
강육항: 1958년생 가수.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대만으로 이민가서 가수 활동을 했다. 이문세 등 한국노래를 번안해서 부른 노래가 몇곡있다. 대만 TV를 보면 나름 인기가수 인듯하다. 대만 TV 에서 번안곡을 부를 때면 한국어 가사를 중간에 넣는 경우도 있다.
이강: 1992년생 전 축구선수. KBS2 방송 청춘 FC를 통해 대중적으로도 알려진, '2009 FIFA U-17 월드컵’의 8강 진출 멤버.(당시 대표팀 동료로는 손흥민, 김진수, 윤일록 등). 현재는 개인레슨과 아프리카 축구 방송을 하며 지도자를 준비 중.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났으며 중학생 때 한국으로 귀화했다.
황인덕: 1992년생 배우. 2011년 tvN 오! 보이로 데뷔해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 미남이시네요 대만판에서 강신우 역을 맡은 바 있다.
왕건명: 1993년생 축구선수. 아버지는 화교이고 어머니는 한국인이다. 한국, 대만 복수국적이다. 대만 축구 국가대표이며, 2020년 현재 광주 FC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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