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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yo-saram 고려인(高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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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anada
댓글 0건 조회 357회 작성일 22-10-08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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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yo-saram
https://www.google.ca/search?q=koryo-saram&ei=uY-DZOLrNcSA0PEP9sursAg&ved=0ahUKEwiirNi-h7f_AhVEADQIHfblCoYQ4dUDCBA&uact=5&oq=koryo-saram&gs_lcp=Cgxnd3Mtd2l6LXNlcnAQAzIICAAQigUQkQIyBQgAEIAEMgUIABCABDIFCAAQgAQyBQgAEIAEMgUIABCABDIECAAQHjIECAAQHjIECAAQHjIECAAQHjoKCAAQRxDWBBCwA0oECEEYAFCFHliFHmDrKmgBcAF4AIABU4gBU5IBATGYAQCgAQKgAQHAAQHIAQo&sclient=gws-wiz-serp
https://namu.wiki/w/%EA%B3%A0%EB%A0%A4%EC%9D%B8

1. 개요[편집]
Корё-сарам[1]/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 Этнические корейцы (러시아어)
Корьо-сарам (우크라이나어)
Карё-сарам (벨라루스어)
Koryo-saram (영어)[2]

고려인(高麗人)은 소련 붕괴 후의 구 소련 지역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의미하는 민족 명칭이다.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약250여만명의 조선족의 5분의 1 정도이다. 러시아[3]와 중앙아시아[4]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러시아 서쪽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의 발트3국과 캅카스에도 소수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러시아 제국령 프리모리예주(연해주)로 이주하였던 '재러 한인(혹은 재러 조선인)'에서 기원한다.

그 외에도 사할린섬에 사할린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데, 사할린은 한 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그리고 이 곳의 한인 이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당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종전 이후에 사할린이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방치된 것이다.[5][6] 즉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하 전시체제기에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아주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재일 한국인과 비슷했으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기존의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이외에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에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북한인 출신으로 소련 시절에 이주노동자로 왔다가 남은 사례이다.
2. 명칭[편집]
대한민국에서는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고 불린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코레이스키'는 '한국의, 한국인의, 한민족의'라는 뜻의 형용사이다.[7] 형용사형이 국적, 혈통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 영어식으로 생각해 러시아어도 그런 줄 혼동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어로 한국인과 한국 남자는 각각 '코레이치(Корейцы)'[8]와 '코레예츠(Кореец)', 한국 여자는 '코레얀카(Кореянка)'라고 부른다.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그룹으로서의 고려인을 지칭할 때 흔히 불리는 말은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 즉 고려사람이다.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이렇게 지칭한다. 여기서 '사람(сарам)'은 기존에 있던 러시아 단어가 아니고 한국어 단어 '사람'을 그대로 가져다 쓴 용어다. 마치 한국어권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러시아인을 가리켜 러시아어 그대로 '루스키예(Русские, 러시아 민족)'나 '로시야네(Россияне, 러시아의 국민)'라고 부르는 셈이다.

'고려인'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근래에 생긴 표현으로,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혹은 연해주 이주 역사에 비하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표현이다. 이전까지는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의 해외 동포들과 같이 그저 '조선인'이라고 했다. 이는 조선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과 북한이 성립되기 이전인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기에 해외로 나간 동포들은 '한국인'이라는 표현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조선인', '조선민족' 등의 용어가 '한국인', '한민족' 등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분단 이후부터로 그 이전까지는 조선이란 표현을 더 빈도 높게 사용했다.

분단 이후, 민단과 조총련을 세우면서 대립이 시작된 재일동포들과는 달리 재소조선인들은 냉전 시기에 공산권인 소련에 소속되어 있었고 북한이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만큼, 당연히 북한에서 부르는 민족 명칭을 따서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정세가 급변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뤄지는 분위기 속에서 재소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고려해 '조선인'을 대체할 중립적인 명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고려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1988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 전소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고려인이라는 명칭이 점차 퍼져나가게 된다. 이후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재소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즉, '고려인'이란 표현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했을 때부터 있던 표현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에 생긴 표현인 것이다.

고려인들의 입장은 그들 자신이 '조선'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닌 소련 사람이고 또한 자신의 언어와 문화도 한 세기 이상 지나는 동안 이미 남과 북과는 이질적인 소련의 특성을 많이 띠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의 것과도 다른 자신들만의 특수한 독자적 특성을 이어왔으니 그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단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표현은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현재 대한민국내에서 재러동포나 한국계 러시아인 같은 표현보다는 고려인이라는 표현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이는 하나의 국가에 정착하여 살고 있어 '재중동포', '재일동포'나 '재미동포' 같은 표현도 자주 보이는 중국, 일본이나 미국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1991년에 해체된 구소련의 구성 공화국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 그룹'을 특정 국적으로 묶기 힘든 점도 한몫했다. 고려인들은 과거 소련 국토 내에 퍼져 살았고, 소련이 무너진 현재에는 러시아 국적이 아닌 고려인도 다수 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된 현재에는 '재소동포'나 '한국계 소련인'대신 '재러동포'나 '한국계 러시아인'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고려인(高麗人)'이라고 하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민족 그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다만 중국의 경우 소련과 함께 공산권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옛 명칭인 '러시아조선족(俄罗斯朝鮮族)'같은 표현도 종종 보이는 편이다. 조선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어에서 '조선족'이라는 표현은 한민족계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3. 역사[편집]
3.1. 기원과 정착[편집]
고려인은 19세기부터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기원이다.[9]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청의 패배로 끝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는 외만주 및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1869~1874년 조선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경하여 그 이북에 아예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고, 1871년 평안도관찰사 한계원은 정부의 승인 없이 압록강 대안의 조선인 개간지를 28개 면(面)으로 분할하여 각각 강계군에 11면, 자성군에 4면, 초산군에 11면, 벽동군에 2면 귀속시키고 항약을 설치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청에서는 봉금령 조치가 이완되고 러시아는 인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들의 국경 침범을 묵인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의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국경의 질서 유지 및 치안 문제로 청에서는 봉금령을, 러시아는 국경 통제를 일시적으로 강화하기도 했지만, 청은 1875년에 봉금령을 완전히 철폐하고 러시아도 조선인 이주 자체를 완전히 막진 않았다. 또한 조선인의 만주 - 연해주 이주를 단속해야 할 조선 정부도 통제에 실패했다. 고종대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집단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고 러시아 정부의 정책 변화는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입지를 굳히게 해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통치와 문화 수용을 거부하는 만주족과 한족의 통제에 애를 먹고 있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어의 사용에 거부감이 적고 러시아 정부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 조선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일부 조선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를 수용하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을 비롯해 여러 아시아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힘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조선인들이 원래 열등한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의 폭정때문에 발전이 더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평을 남겼다.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내에 한국어 화자가 26,000명에 달했다.

1900년대 초에는 영 · 러 간 갈등의 첨예화, 러시아의 남진, 아관파천 등의 문제로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한 뒤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이 때부터 연해주는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최재형과 같이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주 한인 지도자들은 막 이주해 온 의병장,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연해주의 한국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최재형은 안중근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거 이후에는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다. 사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에 협력한다고 여겨서 이주에 제약을 두려고 했지만, 이민은 계속 늘어나 1914년 기준으로 한국계의 숫자가 64,000명에 달했고 러시아 국적자도 20,000명이나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당시 독일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러시아 병사의 육성이 녹음되어 독일 박물관에 남아 있다. 당시 조선인 부대의 군가를 들어보면 "을지문덕, 이순신처럼 열심히 싸워 베를린을 점령하여 러시아에 은혜를 갚고, 전쟁 경험을 살려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하자."라는 내용이다.참조바람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연해주 한인들은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에는 3.1 운동에 호응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직후, 연해주 한인들은 대한 국민 의회를 결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연해주만의 독자적인 정부이던 국민 의회는 독립 운동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공론을 받아들여 상해임시정부, 한성 정부와 단일 정부로 통합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상하이, 한성과의 의견 차이가 커서 완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대한 국민 의회는 정부 통합 이후에도 연해주의 독립 운동 단체로 운영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터지자, 연해주 한인들과 유럽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 단체인 고려인 동맹도 소련 정권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은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백내전에 개입하고 러시아의 극동 지역을 침공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과 각지의 한인 정착지들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최재형을 비롯해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사망했다. 이를 '신한촌 사건' 또는 '연해주 4월 참변' 이라고 부른다.

4월 참변 이후, 연해주의 독립 운동은 기세가 꺾였지만 한인들은 이전보다 더 나빠진 환경 속에서도 계속해서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러시아 내전 초기에 적군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과 일본군이 백군을 돕는다는 점 때문에 연해주 한인들은 붉은 군대에 합류해서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내전이 종결된 후, 소련 정부는 고려 혁명군을 비롯해 붉은 군대에 협력한 독립군들을 무장해제시켰다.

한국 독립군의 입장에서 이것은 배신 행위였으나, 우크라이나 흑군, 녹군, 백군계 카자키 등,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주의 군대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민족 무장 집단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무장해제당했으며 대한 국민 의회도 소멸,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인 한인 동맹이 연해주 한인들의 유일한 자치 단체가 되었다. 소련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로 떠났다.

1923년 고려인의 숫자는 10만을 넘었고, 1937년에는 17만에 이른다. 고려인 학교가 370곳, 신문도 7개나 있었으며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의 자치 공화국 '고려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구상되어 설치 직전까지 갔다. 이때가 연해주에서 고려인의 최절정기였다.
3.2. 중앙아시아 강제 대이주와 새출발[편집]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와 전소(全蘇)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결정 No. 1428-326cc

1937년 8월 21일

원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고려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와 전소연방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원동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한다.

1.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역 지방집행위원회, 원동지역 내무인민위원부는 원동지방 국경부근 지역들, 즉 포시에트, 몰로도프, 그로데코보, 한카이, 하롤,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마코보, 포스트이셰프, 비킨, 뱌젬스키, 하바롭스크, 수이푼, 키롭스키, 칼리닌, 라조, 스바보드느이, 블라고베셴스크, 탐보프카, 미하일로프, 아르하라, 스탈리노, 블류헤르에서 모든 고려인 주민들을 내보낸 후 남카자흐스탄주, 아랄해 구역, 발하쉬호 구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한다. 이주 작업은 그로데코보에 인접해 있는 구역들과 포시예트 지구에서부터 개시한다.
2. 이 작업은 즉시 착수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3. 이주 시 고려인들은 자기 소유물, 농기구, 가축 등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4. 이주민들이 두고 가는 동산, 부동산 및 파종지의 미수확 작물에 대한 가격을 산정하여 그들에게 보상한다.
5. 이주대상 고려인이 출국을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하고, 간소한 국경 통과절차를 적용하여 출국을 방해하지 않는다.
6. 소련 인민내무위원부는 이주와 관련하여 고려인들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폭력과 무질서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들을 강구한다.
7.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 내각들은 이주민들의 거주 지역을 즉시 확정하며 그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고 지도할 의무를 갖는다.
8. 인민교통위원부는 고려인 이주민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원동지방에서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으로 이송하는 데 있어 원동지방 집행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적시에 차량을 공급할 의무를 갖는다.
9. 전소연방 공산당 원동지방위원회와 원동지방 집행위원회는 3일내에 이주대상 가구와 인원수를 산출하여 통지할 의무를 갖는다.
10. 이주의 진행 상황, 출발 구역에서 떠난 인원, 정착지역에 도착한 인원, 국외출국이 허락된 인원 숫자에 대하여 10일 단위로 전문 보고한다.
11. 고려인을 이주시키는 구역들에 대한 국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국경수비병력 3000명을 증원한다.
12. 고려인들이 떠난 건물에 국경수비대원들의 배치를 허락한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의장
V. 몰로토프
전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I. 스탈린

만주사변을 비롯해 일본의 중국 침공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던 소련 정부는 고려인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는 고려인들이 지속적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꼈다.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이 고려인 강제 이주령을 승인한 뒤, 이주 작업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 당국은 3 ~ 7일 전에 이주를 통보해 한인 사회가 제대로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수많은 한인들이 무기력하게 기차에 실려 아시아 정반대쪽의 중앙아시아로 끌려 갔다.

9월에 이뤄진 이주는 11월에 모두 종료되었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기차 안에서 죽어나갔다. 한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유형에 처해졌고 일부는 반소 행위를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주에 저항하거나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이들은 NKVD에게 체포되어 처벌받거나 심하면 사형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인 강제 이주 작업은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농업 집단화 시기의 부농(쿨라크)들도 이러한 폭거에 당했고 1944년 체첸인이나 볼가 독일인 강제 이주를 비롯해 소련의 소수 민족들은 고려인들처럼 급작스러운 강제 이주를 당했다. 역으로 유럽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고려인들이 살던 연해주로 끌려오기도 했다.[10]

강제 이주의 결과, 고려인 17만 24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고(우즈베키스탄 : 7만 6526명, 카자흐스탄 : 9만 5256명), 1938년까지 4만 명이 사망했다. 강제 이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연해주 한인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들 중에는 한인이 아니어서 강제 이주 대상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던 한인들을 그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며 이주를 자처해서 한인들과 함께 떠났고, 중앙아시아 현지에서 계속 한인들을 가르쳤다. 이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세운 사범 학교는 오늘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대학교로 명맥을 잇고 있다. #

고려인 강제 이주는 일부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고 연해주 한인들이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해 일본을 자극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 과정에서 김경천, 김단야, 박진순 등 연해주를 대표하는 한인 독립 운동가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일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당시에 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한인 자치 지구의 설립도 결국에는 백지화되었다.#

당시 NKVD의 문서에 따르면, 연해주에서 일제 밀정들이 많이 활동했고, 한인 중에서 일제에 협력한 부역자들이 상당했다고 한다.[11] 소련측이 이유없이 강제 이주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당장 일본군이 연해주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2011년에 공개된 문서에는 연해주 한인들이 소련 중앙 정부가 소수민족에게 복리증진을 위해 지급하는 지원금을 중앙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고국의 독립 운동 자금으로 쓰고 있어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소련 정부는 연해주 한인들이 일본에 부역하는 것도 걱정되지만, 또한 이들이 독립 운동을 지원해서 일본을 자극할까 봐 아예 통째로 먼 곳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1941년 4월 13일, 일본제국과 소·일 불가침 조약(소·일 중립 조약)을 체결해 이중 전선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불가침조약은 소·일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 되었다. 일본과의 중립 조약 덕분에, 소련은 극동군 병력을 나치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25만 명이 극동군 소속으로 소련을 지키기 위해 유럽 러시아로 이동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 동안, 소련으로부터 4천만 톤의 석탄, 1억 4천만 톤의 목재, 5천만 톤의 철, 1천만 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 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일본간의 무역은 미국과 전쟁 중인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을 줬던 것이다. 소련 · 일본 중립 조약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 이주민들은 소련 정부에서 달랑 천막이랑 얼마안되는 식량만 던져준 열악한 상황의 신천지에서 서로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고, 1920년대에 소련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미 카자흐 지역에서 벼를 재배하고 있던 고려인 선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벼 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고려인들은 기존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정착 과정에서 이른바 '마르코프차(Марков-ча)'[12] 혹은 '한국 당근(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이라는 요리가 탄생했다. 냉전이 끝난 뒤, 한·러간 교류가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과 러시아에서 '한국에는 한국 당근이 없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13]

당시 고려인들은 소련 경제 체제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임차농업 방식인 '고본지' 또는 '고본질'을[14] 통해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임차농업 방식 덕분에 소련내의 한인들은 짭잘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소련의 국가 주도 농업이 내포한 총체적인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함께 낳았다고 한다. 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

현재도 고려인들은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러 수교 이후에는 한국에서 농업 기술들을 배워가거나 종자들을 러시아로 가져가서 크게 농장을 운영하여 성공하는 경우들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우랄에서 한인 농사꾼이 짓는 수박 농사

고려말 사용은 1937년부터 약 10년 간 금지되었지만, 그 후 금지가 풀려 민족어 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사범 대학에서는 60년대까지 고려어 학과도 있었다. 고려인들은 '레닌기치(«Ленин кичи»)'라는 한글 신문을 간행하고, 고려어 방송, 고려인들을 위한 극장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교육을 통해 소수 민족들을 동화시키려는 소련 정부의 교육 정책, 자녀 세대의 출세를 원하는 부모 세대의 러시아어 교육 장려 등의 요인이 영향을 미쳐서 고려인 1·2세대는 고려어에 매우 능숙한 반면, 3세대 이후부터는 매우 미숙하다. 그래도 한국과의 교류에 힘을 쓰고 있고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인들은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환경을 열렬한 교육열과 억척스러운 삶으로 극복해 러시아 소수민족 중에서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오세트인, 유대인 다음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성장했다. 당시 소련에서의 고려인들은 우수한 성과를 올리는 근면성실하고 건실한 민족으로 명성이 높고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1944년에 강제이주 당한 체첸인들의 이주와도 비교할만 하다. 체첸인들도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소련 관원들이 들이닥쳐서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끌려 갔다. 몇몇 자료에 따르면, 고려인과 체첸인은 초기에는 충돌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잘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막 벼 재배에 성공한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온정을 베풀어 주었다. 산악 지역 출신인 체첸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농경에도 미숙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농사 짓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아동들을 보육해 주거나 농장에 체첸인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체첸인 노인들은 '그때 고려인들이 해준 개고기가 맛있었다' 라고 기억하기도 한다.

스탈린 사후, 체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소수의 고려인들이 권유를 받아 카프카스 지방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고려인들은 벼농사 대신 야채와 과일 농사를 지었고 이들 덕분에 카프카스 지방의 야채와 과일 소비가 늘었다고 한다. 체첸인들도 과거 자신들을 도와준 고려인들에 대해서 자주 감사를 표했고 그래서 그런지 인종과 종교의 각축장인 카프카스에서 고려인들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15] 하지만 소련 해체 후 체첸 사태로 인해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도 파괴되었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고려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90년대까지 카프카스에 거주하던 고려인 인구는 5만까지 늘었던 적이 있으나, 현재는 1000명 미만 남짓한 숫자만이 남아 있다,
체첸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아 대대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고려인들은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연해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끌고간 체첸인들과 달리 강제이주 며칠 전에 미리 공지를 해줬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생활 터전이 이미 중앙아시아 일대에 묶여있던 지라 체첸인과 같은 대대적인 귀환이 힘들었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며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기록도 아예 못했다.#, #

독소전쟁이 발발할 당시 고려인도 '소련인'으로서 참전하였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여전히 고려인들을 신뢰하지 못한 스탈린의 의심증 때문이었다. 고려인으로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홍범도 장군이 독소전쟁에 참전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홍범도는 이 시기에 극장 수위로 일했다. 이는 의병과 독립군으로 큰 전공을 세운 홍범도를 존경한 고려인들이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

고르바초프 시대에는 한·소관계가 개선되면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가 8월 종파사건 이후 소련으로 망명한 리상조[16], 강상호, 정상진 등 북한 출신 탈북 고려인들이 방한하여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다.
3.3. 소련 해체 이후[편집]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시점의 고려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대다수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한국으로 귀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타지키스탄이나 카프카스에 살던 일부 고려인들은 내전(타지키스탄 내전, 체첸 전쟁)에 휘말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

1993년, 러시아 최고 연방 회의가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을 복권시켰으나,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은 없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 역시 과거 강제 이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피해 당사자들이 서서히 노령으로 사망하는 데다 3세대 이후의 젊은이들은 강제 이주와 관련해서 아예 모르거나 '아픈 과거'라며 언급을 꺼리는 터라 강제 이주의 역사는 잊혀지게 됐다.(참고)

우리가 모르는 고려인 이야기. 카자흐스탄 '알마티'부터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까지

소련 와해 이후 러시아의 극심한 경제적 혼란이 안정되면서 새로 러시아에 귀화하는 한민족 계통을 '신고려인'이라 부르며, 한국계 러시아인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고려인(한국어 자막 있음)
4. 언어[편집]

고려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는 중앙아시아 한국어 혹은 고려말로 부른다. 하지만 세대가 갈수록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멀어지면서 구사할 수 있는 화자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다. 대개 고려인들의 고향은 함경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동북 방언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틀은 동북 방언이나 육진 방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유튜브 댓글에는 경상도 말투가 들린다는 반응이 있는데, 함경도 지역의 방언 자체가 경상도와 표현을 공유하거나 성조 등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 함경도 쪽에서 탈북을 한 사람조차 서울말보다 부산 사투리를 빨리 배울 정도다. 다만 100년 이상 격리되었기에 현재 함경도 지역 방언들보다 더 옛스러운 말투들이 많다.

고려인들이 처음 이주한 곳이 러시아의 연해주였고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는데 당시 소련은 러시아어를 사실상의 공용어로 취급하고 있었다.[17] 그래서 고려인들도 차츰 러시아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고려말 어휘에 러시아어에서 차용된 어휘들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인 후손들과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옅어지면서 현재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일부 노인들 정도나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멸 위기에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많이 쓴다.

비슷한 처지였던 중국의 한국계 중국인(조선족)들과 비교해도 한국어 화자 수가 크게 감소한 편인데, 한국계 중국인들은 냉전 시절에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북한과 교류했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자치구역이 지정된지라 그나마 한국어의 존속 및 확대가 더욱 용이했다. 반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지리적으로도 남북한과 너무 멀고, 그렇다고 따로 자치구역을 가진것도 아닌지라 이러한 교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한국어 화자가 빠르게 감소한 것. 오늘날 고려인들이 배우는 한국어는 냉전 종식 이후 이어져온 남한과의 교류에 따른 영향으로 대한민국 표준어인 경우가 많으며, 그에 따라 젊은 고려인들 중 그나마 한국어가 유창한 이들도 대한민국 표준어를 쓰지 조상의 언어인 중앙아시아 한국어나 동북 방언을 쓰지는 않는다.
5. 문화[편집]
비슷하게 타국에 형성된 소수 민족 집단이라는 점에서 조선족과 비슷하지만, 중국에 비해 동화주의가 심하지 않은 러시아 특성상 자문화를 나름 잘 보존한 편이며 러시아 내에서나 한국에서나 갈등이 거의 없는 편이다. 특히 사할린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러시아 동부 지역에서는 고려인들의 음식 문화가 융합된 러시아식 한국 요리가 널리 퍼져 있을 정도.
6. 규모[편집]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주로 밀집해 있다. 원래는 대부분 연해주에 살았지만 거의 다 강제이주당했고, 현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 갔다가 이주 제한이 풀린 뒤 다시 이주해온 것이다.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독립 국가들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외지인인 고려인들을 박대하고 자민족을 우대하는 경향이 커지자 그나마 고려인들의 옛 고향인 연해주로 돌아오는 것. 러시아 측에서도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므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에게 정착비를 주는 등의 지원을 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외만주 고토를 주장하며 연해주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에 맞서 고려인들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이고 그런 면에서 통일 한국과 한국을 통한 경협에 적극적인 입장이다.[18]

구소련 때까지만 해도 살기 나쁘지 않았던 우즈베키스탄이 독립 이후로 한 동안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나빠졌고 경제적인 혼란이 수습된 이후로도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지라, 많은 고려인들은 삶의 질이 더 좋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떠나는 추세다. 한국에 정착한 연해주 출신 고려인 영주귀국자들은 대부분 파주시 문산읍에 자리를 잡은 상태다. 파주에서는 매년 가을 사할린 어르신 축제가 열린다.

그 외에 사할린 섬에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탄광 지역에 강제징용당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러일전쟁으로 얻었던 북위 50도선 이하 사할린(남사할린)의 탄광에 강제 이주당했다가 일제의 패망 이후 이 지역이 러시아령으로 회복되면서 고려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주 원인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보다는 재일교포의 경우에 더 가까운, 고려인과 재일교포의 중간자적 존재이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주로 한반도 북부 출신, 사할린 한인은 한반도 남부 출신이 많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 문서 참고.

구소련 국가에서 고려인의 인구동태는 다음과 같다.
1989년 우즈베크 SSR 183,140명 → 2017년 우즈베키스탄 176,900명
1989년 카자흐 SSR 103,315명 → 2014년 카자흐스탄 105,400명
1989년 러시아 SFSR 107,051명 → 2010년 러시아 연방 153,156명
1989년 우크라이나 SSR 8,669명 → 2001년 우크라이나 49,817명
1989년 키르기스 SSR 19,784명 → 2020년 키르기스스탄 17,124명
7. 유명 고려인들[편집]
7.1. 군인, 정치인[편집]
기석복
김병화 - 구소련 집단 농장 지도자로, 척박한 사막을 한때 소련에서 제일 가는 생산력을 가진 집단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공적으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무려 2번 받고 4번의 레닌훈장을 받았다.
김승화
김찬
남일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내각 부수상, 외무상 역임.소련군 장교로 독소전,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는 도시전설이 오랫동안 매우 유명했으나 문서가 발굴되며 허구로 드러났다. 실제론 수학교사 출신. 한국전쟁 당시 회담에서 미군대표들에게 러시아어로 "나는 베를린에서 소련기가 게양 되는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당신들은 당시 어디서 뭘하고 있었냐"고 조소하면서 일갈했다고 하는데 전부 뻥카 거짓말에 가깝다.
뱌체슬라프 킴 - 흑해함대 부사령관을 지낸 제독.
유리 텐 - 러시아의 전직 하원의원 (1993-2003).
세르게이 텐 - 러시아의 하원의원. 바로 위에 언급된 유리 텐의 아들이다.
미하일 컬바르트 - 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시장.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크즐오르다 출생으로, 에스토니아인 아버지와 한중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렉산드르 민 - 소련군 대위. 보병 연대 지휘관으로써 총 9번의 독일군 공습을 격퇴하고 우크라이나 볼린 주 해방에 기여한 공적으로 고려인으로써 유일하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알렉세이 초이 - 현 카자흐스탄 보건부 장관
올레크 초이 -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수호이 설계국 수석 테스트 파일럿을 역임하였다. 주요 서훈 내역으로 러시아연방영웅[19]이 있다.
올렉산드르 신 - 우크라이나의 정치인.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우크라이나 동부의 자포로제 시장을 역임했다. 당선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소속된 친러 정당이었던 '지역당' 소속이었으나 유로마이단이 벌어지면서 2014년 2월 24일 당에서 축출당하고 사임을 종용받는다. 당시 친러 정당 소속이라면서 반 야누코비치 세력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로마이단 세력의 지지를 얻은 그는 사임을 거부했고 1년 더 재임할 수 있었다. 이듬해 무소속으로 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재선에 실패했다. 현재는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가 이끄는 조국당과 협력 관계(정당 가입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에 있다.
유리 파블로비치 엠 - 공수군 복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압하지아 전쟁, 체첸 사태 등 다수 참전하여 최종계급 소장으로 2011년에 전역하였다. 전역 후 통합 러시아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서훈 내역으로 러시아연방영웅이 있다. 어머니가 볼가 독일인이라 혼혈이다.
유성훈
유성철
허가이 - 북한 정권 수립 당시 소련파의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김일성에게 비판 받고 자살하였다.
홍범도 - 1911년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후에 대표적인 고려인 지도자로 활동하다 1938년에 카자흐스탄 SSR로 강제이주 당하여 카자크 내의 극장에서 수위장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타계하였다.
황동국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2년 9월 자원입대하여 대전차포병으로 참전했다. 천왕성 작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로스토프-나-도누 해방전, 그리고 이후 폴란드 해방 작전에 참전.#
비탈리 킴 -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주의 주지사이다. 소속 정당은 인민의 종.[20]
마리나 킴 - 러시아의 뉴스 앵커 출신 정치인. 러시아 국영방송 VGTRK의 오후 8시 메인 뉴스 <Вести в 20:00>의 앵커를 맡았으며, 이후 러시아 채널1로 옮겨 아침 정보 프로그램 <Доброе утро>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공정 러시아에서 당 중앙위원회 언론정책상무위원회 서기와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역임하고 있다. 2021년 5월에는 9월 19일에 치러질 하바롭스크 지방 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21] 아버지가 고려인이고 어머니가 러시아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북러정상회담 당시 김정은과 셀카를 찍기도 하였다.
박창옥(1911)
박영빈(1907)
강상호 - 내무성 부상 역임.
박길룡 - 외무성 부상, 동독 대사 역임.
박의완 - 내각 부수상 역임.
7.2. 기업인[편집]
블라디미르 킴 - 기업가. 카자흐스탄 최고 부호이며 광산업체인 카작무스의 회장을 역임했다. 2022년 포브스에 따르면 50억 달러(한화 약 6조 원 초과)의 재산으로 고려인 중 최고 부자이고 세계 부호 순위 552위에 올랐다.
뱌체슬라프 킴 - 카자흐스탄의 기업가. 2022년 포브스 카자흐스탄에 따르면 32억 달러(한화 약 4조 원)의 재산으로 카자흐스탄 최고 부자 순위 4위에 랭크. 카자흐스탄 최대의 은행인 카스피방크의 회장이다.
이고르 킴 - 러시아의 기업가. 러시아와 동유럽에 지점들을 두고 있는 다국적 은행인 엑스포방크의 회장이다.
타티야나 킴 - 한국계 러시아인 여성 기업인. 2022년 포브스에 따르면 21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부호 순위 1445위. 결혼 후 성씨는 바칼축. 러시아 온라인 쇼핑몰인 와일드베리즈의 사장이다.
조 파벨 - 러시아의 기업가. 모스크바에 본사를 둔 러시아 최대 부동산 디벨로퍼 대기업인 캐피탈 그룹의 회장이며 매년 포브스 러시아판 부동산재벌 top 순위에 오른다. 독립운동가 포석 조명희 선생의 친손자이기도 하다.
7.3. 학술인[편집]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킴 - 러시아의 제어공학 교수, 엔지니어
알렉산드르 키이로비치 킴 - 러시아의 컴퓨터 과학자, 모스크바 스팍 기술센터 대표이사[22]
7.4. 문화예술인[편집]
박유리 - 프로듀스 X 101의 참가자. 러시아 쿼터 혼혈이며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현재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빅토르 초이 - 밴드 키노의 전설적 보컬이자 슈퍼스타. 고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뿐만이 아닌 동구권, 나아가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상징적인 이름이다. 그가 쓴 가사들은 현재까지도 동구권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박솔로몬 - 대한민국의 배우. 한국인 아버지와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우즈베키스탄과 대한민국 이중국적이었으나 현재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2022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의 이수혁 역을 맡아 유명해졌다.
변월룡 - 화가. 러시아어 이름은 펜 바를렌(Пен Варлен)이다.
비타 칸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출신으로 러시아 쿼터 혼혈의 고려인이다. 2012년에 온스타일 에서 방영했던 이영진 진행의 헬로우 러시아에서 우승한 모델. 현재 런던, 뉴욕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직 모델이다. 최근 한국 에이전시와도 계약하여 한국에서도 활동 중이다.
아나톨리 킴 - 카자흐 SSR에 출생하였으나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작가이다. 《푸른 섬》, 《연꽃》으로 인해 소련 문단에서 주목받은 바 있으며, 국내에 정발된 소설로는 《다람쥐》, 《아버지 숲》이 있다.
아나톨리 초이 - 카자흐스탄 출신인 MBAND의 멤버.
아니타 초이 -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가수다. 위에 등록된 빅토르 초이와는 혈연관계가 없으며, 그저 초이라는 성씨를 가진 고려인 정치인과 결혼하며 성이 바뀐 케이스. 결혼 전 성씨는 킴(Ким).
옐레나 안 - 러시아 여배우로 러시아+고려인 혼혈이다.
정추 - 카자흐스탄의 음악가. 러시아어 이름은 텐 추(Тен Чу)이다.
조명희 -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문학인.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신문과 잡지 편집을 통해 '망명 문단'을 주도하였고 교편을 잡아 후학을 양성했기 때문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소련작가동맹(СП СССР)의 맹원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1938년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과정 가운데 간첩 누명으로 총살형을 당했고 흐루쇼프 정권기인 1956년에 복권됐다. 러시아어 이름은 툐 멘히(Тё Мен Хи)이다.
파샤 리 - 우크라이나의 배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했다가 2022년 3월 6일 향년 33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제냐 킴 - 우즈베키스탄 출신 패션 디자이너 보그 기사
폴리나 보구세비치 - 주니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17 우승자
루슬란 흐반 - 카자흐스탄에서 두번째 큰 연예기획사인 MM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보이밴드 MAD MEN과 걸그룹 Crystalz, 솔로가수 Malika Yes 등을 프로듀싱했다. 그러나 2021년 3월 마약 밀매 혐의로 카자흐스탄 경찰에 체포되었다.
ARON - 카자흐스탄의 인기 보이밴드 MAD MEN의 멤버. 본명은 로만 파크(Роман Пак).
Ri - 카자흐스탄의 걸그룹 IMZ1의 멤버. 본명은 발레리야 파크(Валерия Пак), 결혼 전 성씨는 랸(Лян). 2021년 위의 아론과 결혼하였다.
7.5. 체육인[편집]
게나디 골로프킨 - 카자흐스탄 출신 복싱 WBA 미들급 세계 챔피언. 어머니가 한국인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인 외할아버지와 러시아인 외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밝혀졌다.
넬리 킴 - 소련의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볼가 타타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체조선수. 단체전 2개를 합쳐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땄다.
데니스 텐 - 카자흐스탄의 남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2018년 7월 19일 괴한의 피습으로 향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막심 킴 - 러시아 팀인 Empire의 도타 2 프로게이머. TI에도 진출한 적이 있는 선수다.
미하일 안 - 소련의 축구선수. 소련 U-23 대표팀 주장을 맡았고, A매치에도 출장했던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김알렉세이(알렉세이 킴)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출신의 그랜드 마스터 체스 선수. 2005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하였다.
야코프 칸 - 러시아의 가라테 챔피언이었으나 2003년 11월 15일에 네오 나치인 6명의 스킨헤드에 의해 피살되었다.
코스챠 추 - 고려인 3세. 소련 복싱 대표로 활약. 프로 전향 후 WBC, I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 현재 복싱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전적은 34전 31승 25KO 2패 1무효.
드미트리 비볼 - 러시아 출신 복싱 WBA 월드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몰도바인 아버지와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7.6. 신고려인[편집]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나 CIS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빅토르 안 - 한국 출신의 러시아 스케이트 선수.
알리야 김 - 카자흐스탄으로 귀화한 한국인 쇼트트랙 선수.
제인 안 - 빅토르 안의 딸.[23]
8. 정체성[편집]
고려인의 정체성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 현대 젊은층의 경우는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은 하고 있다. 사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경우 여권에 민족명을 표기하므로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대부분 고려인들의 경우 모국어가 러시아어이다. 고려인들의 이름 역시 거의 모두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외적인 정체성 면에서는 러시아인에 가깝다. 소련 시대의 고려인들은 소수민족으로써 대체로 초민족주의적 소련인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러나 문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각 연방 구성국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점이다. 때문에 소련시절 관공서에 종사하던 고려인 상당수가 소련 해체 이후 쫓겨나는 등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인들의 외적인 정체성은 자의가 아닌 스탈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스탈린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한국어 사용 및 교육과 함께 학교마저도 설립을 금지했으며 통혼과 혼혈 동화를 강권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설과 추석에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평소에는 김치와 함께 한국식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또한 자신들의 강제이주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위령탑과 기념비등을 세웠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 대부분은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독립 후 새로 지정된 현지 공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지어를 배우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뭐 아직까지 이쪽 지역에서는 러시아어만 잘하면 생활에는 문제가 없기도 하고. 아니 오히려 일상생활에서는 러시아어가 더 중요하다.

또한 소련 해체 후 지역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여러 심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 중에는 연해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해주를 자신이나 부모의 '고향'으로 여기는 노인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젊은 고려인들 가운데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한국 사회단체의 지원상황이 다큐형식으로 한국TV에서 방송된 적 있다. # 비슷한 처지의 또다른 일부 고려인들은 러시아어 외에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현지 공용어를 배우는 경우가 존재한다.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커녕 고려말도 제대로 못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 그래도 다른 러시아 젊은이들이 "한국? 그게 어디 있는 나라인가?" 하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좀 노력을 한 후손들의 경우에는 한국으로 일하러, 혹은 유학으로 오는 케이스도 있다.

고려인들은 언어적인 측면 등 러시아 문화에 동화된 부분도 많지만 상술한 한국 당근을 비롯해 한국 요리의 식습관을 지켜나가고 있다. 우즈벡이나 카자흐스탄의 좀 큰 시장에 가면 분명히 어딘가에는 고려인 반찬 가게도 있으며 국시 같은 이름의 요리도 찾아볼 수 있다.[24] 단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백여 년 전 옛날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남한)의 요리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북부지방 베이스, 남한의 한국 요리는 중남부지방 베이스인데다 식재료도 구하기 힘든 전통 한국 식재 대신 중앙아시아의 상이한 식재료들로 만든 것이라 더욱 다르다. 가령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김치에는 구하기도 어려운(어려웠던) 젓갈을 거의 넣지 않으며 맵고 짠 맛도 덜하다. 그래서 요즘엔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많이 오는데 그 사람들이 우즈벡에 돌아간 후 주변에 사는 현지 고려인들에게 이런저런 한국 요리가 맛있더라, 오랜만에 먹어보게 한 번 만들어달라고 하면 정작 그 고려인들은 생판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거나 시래기국, 국수 같이 이름은 같은데 막상 받아보면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서 오히려 우즈벡 사람들이나 중앙아시아 한국 요리를 접한 한국인들이 충격과 공포로 당황해하는 사례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만일 고려인들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안산역에서 멀지 않은 선부동의 땟골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이 지역에는 고려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거리에서 들리는 말도 거의 러시아어이고 간판의 글자들도 러시아어가 대부분이다.[25] 한국에서는 경기도 안산 땟골사거리의 우갈록과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식당 등에서 고려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러시아 음식도 같이 판매하고 있는데, 국시(кукси)[26], 닭고기해(кя хе), 피고자(пегодя), 편수(пянсе) 등이 고려인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2018년 12월 14일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고려인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통합단체를 출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재한고려인 지원단체인 '너머'는 고려인들의 한국정착을 위해서는 한국어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려인을 귀환자로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민족학교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소설가 김숙은 정착지서 쫓겨나 고통 겪는 고려인의 삶을 소설로 계속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작가 정성태는 고려인과 관련된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강제이주 후 향수 간절한 고려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한러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늘고 있다.#
9. 대중매체 속 고려인[편집]
고려인에 대하여 한국 미디어에서 그렇게 크게 다룬 것은 없다. 따로 자치지역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구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닌데다가 아무래도 고려인 3-4세대 즈음 되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현대 한국인 가운데 러시아에 익숙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 영 약하기 때문이다.

1995년에 까레이스키라는 고려인을 다룬 드라마는 있었고, 당시 MBC에서 제2의 여명의 눈동자를 꿈꾸면서 엄청나게 밀어주던 드라마로 드라마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했다는 평이었는데 하필이면 모래시계와 장녹수에 밀려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허영만의 만화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악역인 고려인이 나오는데 러시아에 진출하던 천마 모터스에 대하여 훼방놓던 라이벌 기룡 모터스에게 매수당했던 것. 주인공 이강토가 난데없이 한국인으로서 긍지도 없냐고 하자 이 사람은 "난 한국을 조국으로 여겨본 적도 없는데 뭔 소리야?"라고 응수하는데 극중 얼음물에 빠져 익사한다. 이를 두고 한국만화의 이해라는 90년대 책자에선 민족주의에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팬들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미라 한이 고려인 계통이라는 떡밥이 있다. 러시아 억양이 강하기 때문.
9.1. 드라마 <까레이스키>[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까레이스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2. 하나안[편집]
박루슬란 감독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이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 기준으로 2012년 10월 11일 개봉했다.

고려인 4세 '스타쓰(스타니슬라프)'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고아인 스타쓰는 주차장 관리 일을 하며 불량학생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꿈꾸던 마약단속 형사가 된다. 하지만 경찰서에서의 부정부패에 환멸감을 느끼고 그만두고 결국 자신이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다. 어찌저찌 결국 마약에서 벗어나 영화 제목인 '하나안', 한국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다시 마약과 얽히게 된다.

고려인에 관한 내용보다는 마약과 방황, 부정부패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남자주인공 또한 고려인 4세이며, 첫 영화작품이었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고, 하와이 영화제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 대만의 타이페이영화제 최우수 신인감동상 수상을 수상했다.

하나한 공식 SNS계정
9.3.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편집]
안젤리아라는 고려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본명은 "안나 빅토로브나 최".
9.4. 좋좋소[편집]
백진상의 거래처 상대로 등장한다. 이름은 표토르 최.
9.5. 템빨[편집]
소설 속 게임인 'Satisfy'에서 통합랭킹 1위인 크라우젤이 카레이스키다.
10. 논란 및 문제점[편집]
10.1. 무국적자 문제[편집]
소련 해체 이전의 고려인들은 출신지가 우즈베크 SSR를 비롯한 각 연방구성공화국이었다. 즉 소련은 다양한 국가들의 강제 연합체였기에 소수민족 배척이 적었으며, 이에 소련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 각 개별국가들의 러시아어 배제 정책에 따른 정보 불충분, 대숙청으로 인한 서류 분실, 체제 전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이 새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 소련 지역에 현재 전체 고려인의 12%에 해당하는 약 5만의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KBS 2TV 추적60분 2006년 1월 4일 방영분에서도 무국적자 고려인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다.

무국적자의 자녀는 무국적자가 되며, 이 경우 국제결혼 후 배우자의 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거주하게 될 경우 무비자로 입국하게 되는데, 무비자 상태로는 경제적 생산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출처.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있다면[27]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10.2. 문재인 정부의 '강제이주'에서 '강제' 삭제[편집]
문재인 정부가 2017년 11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방한을 앞두고 외교부에서 배포한 책자에서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에서 '강제' 글자에 모두 스티커를 붙여 삭제하여 논란이 되었다. 우즈벡 대통령 방한…고려인 '강제이주'서 '강제' 삭제 이유는? 친한(親韓)파로 알려진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방한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방한한 국빈이었다. 하지만 11월 22일 입국한 직후 미르지요예프 대통령 측이 "우즈벡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24일 예정된 국회 연설 취소를 갑작스레 요청하였는데, 그 내막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었다.
10.3. 소련과 러시아, 고려인 등을 구분 못해서 생기는 차별[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당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방문한 사람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는데 반러, 혐러를 빙자해서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에서 이번 전쟁을 가지고 고려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당사자들 입장에선 황당한 제노포비아 레이시즘 사례가 늘고 있다. # 그리고 재한 고려인 대부분은 러시아 본토 출신이 아니라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국적은 소련이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이 아니었다.
11. 오해[편집]
11.1. 중앙아시아의 황인들은 고려인이다?[편집]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등 중앙아시아 사람들 중 황인이거나 황인 외모에 가까운 사람들[28]을 보고 고려인일 거라고 섣불리 단정 짓는 경우가 은근히 자주 보이는 편이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배구 선수인 사비나 알틴베코바의 사진을 보고 고려인이 아닐까하고 추측하는 반응들은 물론이고[29], 키르기즈인을 보고 고려인으로 단정 짓는 반응이 그 예시.

이런 착각은 중앙아시아를 백인종의 세계로 단정짓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한국 인터넷에서 소위 우즈베키스탄 미녀라고 떠돌던 사진들도 다수가 슬라브계 여성 사진인 것도 이런 오해를 부채질한다.[30]

그러나 사실 중앙아시아는 슬라브계 백인이 아니라 튀르크계 황인 또는 황백혼혈이 다수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유럽계 백인들의 정체는 19세기 이후인 제정 러시아,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과 소수의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폴란드계 러시아인 등의 후손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소수민족이다. 물론 고대에는 슬라브계는 아니지만 같은 백인 인종인 이란계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으나, 몽골 고원 및 만주 서부에서 지내던 튀르크인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결국 오늘날처럼 타지크인 및 슬라브계 이주민들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주민 대다수가 튀르크계 황인 혈통이 된 것이다.

카자흐스탄 인구의 63%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인은 튀르크계 민족이자 몽골계 혼혈로 전형적인 북방 황인종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인구가 1850만명인데 고려인의 수는 10만명에도 못미친다. 키르기스스탄 역시 황인인 키르기스인 비율이 전 인구 중 68%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우즈베키스탄 역시 3000만명의 우즈베키스탄 인구 중 고려인의 수는 20만명에 못 미쳐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 중 1% 미만이다. 당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나 이슬롬 카리모프의 사진만 봐도 잘 쳐줘야 황백혼혈 얼굴이다. 즉,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황인들은 고려인이 아닐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황인들의 외모는 엄밀히 말하자면 고려인 등 한국계보다는 옆동네인 독립국가 몽골의 할하인 등 몽골 제민족들과 더 비슷한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한 동아시아인 외모를 가진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은 몽골 제민족[31]을 닮았으며, 유라시안 튀르크인인 우즈베크인과 투르크멘인은 같은 유라시안 튀르크인인 위구르족과 외모가 비슷하다. 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 5개 민족[32] 중 타지크인만이 유일하게 동아시아인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진 페르시아계 백인이다.[33]
12. 한국 내 고려인 거주지 현황[편집]
안산 땟골마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광주 고려인마을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
청주 고려인마을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
인천 함박마을 :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13. 여담[편집]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은 한국의 후손이면서 카자흐스탄의 국민이라는 두가지 정체성을 지녔다고 한다. 이는 카자흐스탄이 비교적 고려인에 포용적인 기조가 원인인듯.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원 예산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문화정책 방향을 따라야한다. 1932년 연해주에 설립되어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아카데미 칭호를 받았다. 해외에서 설립된 한인 공연단체 중 그 역사가 가장 깊고 그렇기에 단원들 96명 중 대부분이 고려인이며 민족예술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에는 고려인 4세는 재외동포법상 동포가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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