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s_in_Japan 재일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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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재일 한국인-조선인, 즉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 등은 넓은 의미로 보면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 국적자 및 그 자손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일본으로 건너와 "특별영주자" 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국계 거주자[2]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말해,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서 사는 한국 국적의 한국인은 "일본 거주 한국인"[3]이라고 불리며, "재일 한국-조선인"과는 구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하며, 일본 내에서는 줄여서 재일(자이니치)[4][5]이 라고도 부른다. 한국 국적[6]을 가지고 있는 재일 한국인과 조선적(朝鮮籍)[7]을 가지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두 부류가 있다.[8] 본 문서는 좁은 의미의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일본 거주 한국인"에 관한 내용까지 통합하여 기술하고 있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국가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재외국민 등록되게 되어있다.[9]
2015년 1월 22일 이전까지는 여권 갱신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으나 재외국민 주민등록제도 실시이후 영주권 취득자, 해외 이주자도 이전처럼 주민등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특별)영주자도 엄연한 외국 국적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이며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귀화하기 싫다면 그냥 투표권이 없는 외국 국적자로 살든가 국적을 가진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2021년 6월의 일본 정부 통계에 의하면, 특별영주자 전체 수 300,441명 의 98.8%인 296,922명이다. [10][11]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았지만 1990년대 이래 들어선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하지만 아직도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재일 외국인 참고.
재일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영상[12]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상.
2. 재일 한국-조선인의 역사[13][편집]
현대 재일동포[14]의 시작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15]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비율로 보면 제주도가 50%, 40%가 경상도, 10%는 나머지일 정도. 실제로 이 두 지방은 일본과 거리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많이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이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들이 그 곳과 가까운 광동성, 푸젠성 출신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사카의 이쿠노구 츠루하시역에는 올드커머 계통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여기의 백제문 현판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오사카 사투리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来てえな 見てえな 買うてえな)"라고 써 있을 정도. 부산 자갈치시장에도 똑같은 글귀가 대문에 써 있는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 음식 '전'도 일본에선 서울말 전이 아니라 경상도 방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인 찌짐(チヂミ)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전(요리)'의 일본어 항목은 찌지미(チヂミ)로 작성되어 있다.#
제주도 출신도 일본에 많이 건너갔는데, 본토에서 경상도 인구가 제주도 인구의 20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동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슷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많이 넘어갔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주산업이 농업과 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 출신에 대해 멸시하는 분위기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하게 차별받는다면 일자리나 대우면에서 한반도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본본토가 메리트가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또한 제주가 경제적으로는 열악해도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국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 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인상하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16]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는 우선 대상인 탄광, 군수공장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를 대량의 조선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은 각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치[17]였기 때문에 일본어/한국어에 대한 소통능력의 부족[18], 숙박 인프라의 구축[19]이 따라가주지 못했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우월사상[20]이 동반되어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했고 할당량은 채워야 됐기 때문에 결국 징용을 실시했다.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 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을 이용했다.[21]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이다."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 및 분열되어 민단/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 때 원자폭탄을 맞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22]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23]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제국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24][25]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아니고.[26]
전후 한국으로 귀향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27]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28]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29],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30] 1960년대~1980년대의 독재시절에는 간첩사건을 찾아다니던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서는 재일교포를 한국인이 아니니 잡아서 고문과 허위 자백을 받아도 별 탈이 없어 간첩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호구로 봤고 이 때문에 많은 재일교포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포함해서 재일교포 간첩 사건만 100건이 넘어갔다.# 사회에서도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 외국인 특히 일본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31]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 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포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모았다. [32]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33]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34],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 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35][36] 비참하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은 빨갱이 공작원, 민단은 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37][38]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 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을 멸시해 온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코카쿠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다니던 중[39]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고, 대학 졸업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40]
1952년부터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법' 14조를 제정해 재일동포에게도 지문을 강제 날인토록 했는데, 3년 갱신이 원칙이며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및 금고, 벌금 3만 엔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감시 및 통제수단이라는 지적이 일어 1980년 9월 신주쿠구청에서 교포 1세 한종석이 지문 찍기를 거부했고, 이에 2세들도 동참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으켜 정부에 철폐를 촉구하며 재판도 벌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주기를 1982년 5년, 1987년 1회로 각각 완화시키다가 1993년에 완전 폐지했다.
현재 한국에 재정착한 재일교포들은 현재 제주도, 경상도에 주로 살고 있다. 이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된다. 그리고 한국어하고 일본어 둘 다 유창하게 한다.[41] 그래도 몇몇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기도 한다. 다만 1990년대생 이후의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모국 돕기에 앞장서 온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초중고 교과서에 실어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3.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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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재일 한국-조선인(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도 포함)의 인구는 한국 426,908명, 조선적 27,214명으로 총 454,122명이라 하며, 이중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이 아닌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는 300,786명이고, 한국-조선적 국적의 누적 귀화 허가자 수는 379,878명이라 한다. #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42][43]
재일교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재일교포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다.[44]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는 2ch 관서 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45]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관동 쪽의 재일교포가 많은(많았던) 곳은 도쿄도 고토구의 에다가와와, 카나가와현의 카와사키시이다. 이 2곳은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공장지대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구였다. 오사카와 달리, 이 2곳은 한국적인 것은 없다. 길게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적으로는 해방 전후부터 쭉 살아왔던 오사카와 달리 1964 도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판자촌에 살던 재일교포들을 치안과 경관문제를 이유로 공업지구에 이주시키면서 생긴 곳이다.
당연히 그곳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그 지구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곳곳에 파출소를 설치했다. 깡패마을로 밤마다 폭주족과 야쿠자 및 성범죄가 수두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개발되어 치안이 급격하게 호전되어 현재는 도심부에 편입되었다.
관동 지역의 한인촌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오쿠보로 대표되는 히가시신주쿠 일대가 있다. [46] 원래 이 일대는 빈국 출신의 불법체류자 거주지로 유명했다. 가부키초에 가까워 암흑가와도 연결된 우범지대라 땅값이 저렴했다.
이 일대에 한인촌이 형성된 데 2개의 설이 있는데,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져 재일교포의 고용이 다수 이루어져 노동자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이후 70~80년대 일본에 일하러온 불체자 한국인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다른 국가 출신 체류자들과 달리 이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의 네트워크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국적에 비해 자리잡기가 유리했다. 그렇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에, 90년대 후반부터 한일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고 있다.[47]
이 뉴커머들이 오오쿠보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은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투명 비닐봉투를 구매하여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기하거나 길거리에 버리거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투기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한밤 중에 난동을 부려 현지 일본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한인촌 자체가 축소 되면서 중국인-재중동포(조선족)와 베트남, 네팔, 파키스탄 등의 아시아계 다국적 체류자들이 많다. 할랄 푸드 취급점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아시안타운이라고 해도 될 태세.
한인촌 축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가지였다. 애초에 일본물가로 봐도 너무 높은 바가지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일본인도 한류붐과 희소성을 이유로 납득해왔지만,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음식의 질이 가격에 비해 너무 후져, 대다수의 뉴커머 가게는 단골을 만들지 못하고 한인촌=비싸기만 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한류가 가라앉고, 그나마 있는 한류팬도 차라리 한국에 가버림과 동시에 혐한바람이 불면서 한인촌에 찾아가는 일본인이 줄어 줄줄이 망했다. 반면 현지화가 이뤄진[48] 일본의 차이나타운이 중일관계악화로 가속된 혐중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또다른 뉴커머들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한인촌의 단일화가 있다. 뉴커머 업소들은 완전히 일본에 정착할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짧고 굵게 돈을 벌려고 그때 유행을 이용한 업소를 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일본에서의 1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삼겹살집을 하고, 2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막걸리집을, 3차 한류붐에서는 어디가도 치즈닭갈비집인 상태가 되었다. 이런 거까지 한국 묻지마 창업하고 똑같네... 이러한 단일화는 한인촌의 매력 감소와 더불어 다양성이 부족하게 되어, 한류붐이 지나간 후에는 한꺼번에 망하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와, 빈 업소에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여 한인촌의 지속적인 감소를 불러왔다.
실제로 1차와 2차 한류붐이 지나가면서 한인촌이 급격하게 축소하여 주변 타국가 업소가 진출하였고, 현재 3차한류 붐에 한국인들이 세운 점포 자체는 늘어났지만, 한인촌의 영역은 예전보다 축소되었고 한인촌 가운데에 대놓고 인도/베트남/터키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고, 터키인이 만드는 치즈핫도그집, 베트남인이 만드는 치즈닭갈비집등의 한류고객을 노린 외국인 업소도 많이 보이는 실태였는데, 2018년부터의 급격한 한일관계의 악화, 3차 한류붐의 종식[49], 2020년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외식업의 몰락으로, 이제 한인촌의 3차몰락과 축소, 심각하게는 소멸이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러한 뉴커머 업소들은 전통적인 한국 음식점들[50]이 밀려나게 하고, 최신유행 음식만 나오는 곳이 많은 한인촌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행이 지나면 그 자리를 타국가 출신들이 창업한 점포가 차지하고, 유행이 오면 다 똑같은 업소가 되고를 반복하는 뉴커머 부작용의 연속으로 일본 한인촌 전체가 점점 소멸하는 길로 가고 있다.
재일교포들 중에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교포들도 있다. 뉴커머들에게는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문제를 일으켜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일본에서 망한 인간이 한국으로 돌아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할 수 있지만, 재일교포에게는 일본이 삶의 터전이며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교포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 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혀버리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앗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51]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어"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코리아국제학원이 창설된 계기도 오사카 지역에 조선학교[52]를 대체할 제대로 된 커리큘럼의 한국학교가 없어서였다고. 특례입시생들이 배우는 커리큘럼과, 현지 재일교포 3세들이 배우는 교육 커리큘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입시제도하고 국어 영어 수학부터가... 그러나 조총련계 조선학교나 민단계 한국학교에 다니는 재일교포는 애초에 소수이며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일반 일본학교에 다닌다. 이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고 보통은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기며 다닌다.
참고로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 정확히는 파칭코 기계를 돌리는 파칭코업장[53]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으며, 파칭코장 체인점 시장점유율 1위의 마루한과 2위의 다이남 모두 한국계 기업이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북한의 핵실험에 일본 파칭코로 번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며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하는데[54] 파칭코에 돈을 갖다바치는건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욕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거기다 이렇게 된건 1970년대까지 재일교포는 일본내에서는 매우 심한 차별을 받았고 일반 기업에서도 채용을 해주지 않는 등 정상적인 직업을 갖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은행업, 상업, 자영업같은 서비스업이나 다른 일본인들이 꺼리는 직업같은 3D 직종이나 유흥업같은 어둠의 직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체능계나 스포츠계로 진로를 정한다면 형편이 나았다. 그 어둠의 직종 중에서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칭코 사업과 야쿠자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6년부터 금지됐던 파칭코 업소가 해금되고 해외에서 돌아온 넘쳐나는 전역군인들이 할일이 없어서 술과 도박에 매진하다가, 이전 까지 공을 하나하나 수동으로 발사하던 파칭코를 마사무라 타케이치(正村竹一)라는 인물이 자동으로 공을 연발하는 연발식 파칭코를 발명하면서 일본사회에 대대적인 파칭코붐이 일어난다. 마사무라 타케이치는 자기도 파칭코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자신의 기계나 사업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전수하였기에 일본 패전으로 본토가 폭격으로 삶의 터가 공터가 되버린 일본인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파칭코사업에 뛰어 들게 되었다. IMF시기의 PC방열풍과 비슷하다
이러한 파칭코 열풍과 당시 파칭코 부품의 마모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결과[55], 마을에 있는 소규모 철물공장에서 파칭코 부품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 하였고, 당시에 3D업종이나, 철물공장을 운영/노동을 하는 재일교포에게도 그 엄청난 양의 수주가 계속 들어오면서 "그렇게 돈이 되는건가?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식으로 재일교포들도 파칭코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마사무라 타케이치또한 재일교포에게도 자신의 파칭코 사업 노하우나 기계를 전수하였고, 일본에 대 파칭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당시의 파칭코는 순전히 오락기로, 경품으로 당시에는 고가인 담배나 과자를 받을수 있었는데, 파칭코업이 성행하면서 점차 경품을 현금화하기를 바라는 고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칭코업장이 현금을 내거나 자신의 경품을 고객으로 부터 현금으로 다시 사는건 도박으로 간주되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를 우회하는 차원에서 파칭코업소 앞에는 "買人"(바이닌)이라는 파칭코업소에 나오는 손님에게 경품을 사는 사람들이 나왔다. 불량배나 거지, 장애자, 상이군인, 남편을 잃은 미망인, 야쿠자들이 바이닌을 하는 가운데 재일교포 업소는 재일교포끼리 돕는 차원으로 일이 없는 재일교포 아줌마에게 바이닌일을 맡겼었다.
일본 경찰들도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파칭코 업소가 실업자를 줄여주고, 자칫하면 폭도화[56] 재일교포들의 일할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폭도화 되지 않는다라는 차원으로 일부로 눈감아 왔다. 그러다가 야쿠자의 입김이 강해지고 자신의 세력이 아닌 바이닌들을 내쫏고, 파칭코업소에게 보호비 및 경품을 과하게 높게 사가라고 압박하는 행태가 많아지면서, 점차 파칭코라는 업계자체가 어둠의 직종으로 변질되어갔다. 야쿠자의 자금원으로 변질되어버린 결과 1954년에 인기였던 연발식 파칭코가 금지되면서 수많은 파칭코 업소와 회사가 사라지게 되는데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돌입하면서 일본인 업주나 사장들은 일찌감치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에 취직할수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럴수가 없어서 남아서 파칭코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 일본의 사회적 배경으로는 1954년에 GHQ의 지시하에 이전까지의 중앙집권적인 경찰조직을 각지방마다 쪼개서 민주적인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체 경찰로 변경되었는데, 이러한 조직의 변모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의 중앙경찰에게는 불만이 많는 개편이었다. 1954년, 경찰법이 바뀌면서 경시청(警視庁)가 탄생하는데, 이 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악명높은 특별고등경찰을 만든 내무성의 관계자들이였었고, 2대 경시청장관인 이시이 에이조우(石井栄三)는 "일본 같은 민도가 낮은 국가에서 자치체에게 경찰권을 주면 제대로 치안을 지킬수 있겠냐."하는 지방을 깔보는 발언을 일삼았으며, 나라에서 지방경찰에게 가야할 예산을 도쿄의 경시청이 막아서 혼자 독식함으로서, 일부로 지방경찰이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해와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지방경찰과 경시청의 대립의 씨앗을 뿌려왔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파칭코 업소의 개업 허가는 지방의 서장이 가지고 있기에 경찰의 소중한 자금원이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경찰인력에 비해, 사회주의 운동과 테러의 확산, 야쿠자의 세력확대에 대처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각종 사회약자들을 받아주면서 사회안정에 이바지하는 파칭코까지 몰락하면, 지방경찰로서는 답답할 노릇였는데, 1961년 오사카부경찰 소속경부였던 미즈시마 넨토구(水島年得)가 고안한 방식으로 파칭고 및 바이닌업계에서 야쿠자를 완전히 배제하는 목적으로, 바이닌이 하고 있는 기능을 지방경찰이 허가한 장애자 및 미망인 협력업체에게 일임함으로서 파칭코에서 야쿠자의 영향력을 없애는 방식, 일명 "오사카 방식(大阪方式)"이 생겨났다.
각 파칭코업자도 야쿠자의 보호비를 낼바에는 공익야쿠자(경찰)가 낫다면서 오사카 방식으로 갈아타기 시작하였고, 이 방식이 전국에 퍼지면서 일명 "삼점방식(三店方式)"로 정착하였고, 1954년의 규제이후, 파칭코의 사행성이 많이 낮아짐에 따라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방식으로 탄생했을때, 도쿄의 경시청이 "그거 도박이니까 금지시켜!" 라고 강제 통보했지만, 파칭코 업계에서는 "경찰 좆까" 라면서 개기다가, 위법도 합법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카지노 해금법을 통과시킨 배경에도 일본 도박 사업의 대부분이며, 재일교포들이 중심인 파칭코에 대해 사실상 재편하여 간접적인 제재를 하려는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법안은 외국인 뿐 아니라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카지노 사업까지 포함하고 있어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성화 되면 현재의 일본 파칭코 사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파칭코 시장 규모와 잠재적인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점 등을 들어(일본 파칭코 사업규모는 약 230조 원, 일본의 초기 카지노 예상 시장규모는 약 10조 원 가량)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4.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편집]
5점 만점 기준. 참고로, 여기 있는 평점은 일본인이 만든 '도쿄 DEEP 안내'라는 사이트의 평점을 인용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관점과 재일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것.
도쿄도
신오쿠보 [57] - 신주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3
아자부주반 [58]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2 | 치안: 4
아카사카 [59]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2
미카와시마 [60] - 아라카와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5 | 치안: 3
히가시우에노 [61]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3 | 치안: 2
우에노나카쵸우 거리 [62] - 다이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아사쿠사 데라(절)뒤 [63]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에다가와 1번지 [64] - 고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킨시쵸/카메이도 [65] - 고토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코이와 [66] - 에도가와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산겐챠야 [67] - 세타가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오오야마/오오야구치 [68] - 이타바시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3 | 치안: 3
시바우라 다카하마바시 [69] - 미나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1 | 치안: 2
니시아라이 [70] - 아다치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4 | 치안: 2
카나가와현
오오힌 지구 [71] - 카와사키시 카와사키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1
토데4번지 [72] - 카와사키시 사이와이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1 | 치안: 1
신마루코 [73] - 카와사키시 나카하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사이타마현
니시카와구치(西川口) [74] - 카와구치시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3 | 치안: 2
치바현
사카에쵸(栄町) [75] - 치바시 주오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출처
그 외 지방에서는 오사카의 츠루하시가 오사카의 한국인 교포 밀집 지역으로 유명하다. 교토에선 히가시쿠조(東九条)와 니시쿠죠(西九条)가 유명하며, 히가시쿠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동구조가 변형되어 히가시쿠조를 '통쿠'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5.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의 언론[편집]
재일 한국-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언론 간행물들은 민단, 총련마다 각각 하나씩 있으며, 신오쿠보에 가보면 무가지가 넘쳐나는 일본의 사정상 한인잡지(월간유학생) 등이 배부되기도 한다. 민단은 민단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총련은 조선신보라는 이름으로 각각 남/북교민용 신문지를 발행중이다.
이와는 무관하게 재일 한국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KNTV라는 방송국이 존재한다. 지상파 방송은 아니고, SM엔터테인먼트 산하 스트림 미디어 코퍼레이션의 비 지상파 위성방송인데 재일 한국인 시청자들을 위해 한국 방송프로그램들을 수입한 다음, 자막을 붙여서 재방영하는게 주요 일과.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 방송 프로그램 소개 모둠에 가까운 구성이었으나, 한류붐의 시작 이후 한국 미디어가 궁금한 한류팬들의 수요가 소소하게 생겨서, 한류팬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을 추가로 갖추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는 듯.
최근에는 KBS World, 엠넷 재팬도 생기고, 독립방송국, 지방방송국이나 BS, CS 방송국에서 허구헌날 틀어주는 게 한국 드라마라 일본 현지인들도 한류 팬이 되기도 한다. 방송사들도 해외전용 유튜브채널로 예능, 드라마를 틀어줘서 교민들도 관심을 갖는 편.
6. 재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혼 및 혼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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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출처 :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붉은색은 재일 조선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 연두색은 일본인 남편과 재일 조선인 아내, 파란색은 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여자의 혼인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76]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77]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노년층)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7.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인식[편집]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가면서 비일본인 아시아계 인물, 그중에서도 특히 화교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 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78] 서브컬쳐에는 아후로디 같은 캐릭터가 있다. 단, 일반 문학에서는 종종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혐한이나 넷 우익들은 자신들의 혐한 사상을 정당화시키려는 수작질의 일환으로 일부러 재일교포와 단순히 한국계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재일 한국인의 숫자는 100만이 넘는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된 인원을 더하면 재일 한국인이 재일 중국인보다 더 많다는 식의 카더라를 마구잡이로 선동했다. 넷 우익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재일 한국인이 일본언론 매체를 조종한다는 주장을 한다.[79] 또한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반발하는 상대방은 몽땅 재일로 몰아간다.[80] 유명한 일화로는 박존파. 공식 집계에서 채 70만도 되지 않는[81] 재일 한국인이 1억 2000만 일본인을 조종한다는 건, 한국에서 채 70만도 안되는 조선족과 재한 중국인이 대한민국을 조종하고 있다는 혐중성 음모론과 거의 동급 수준이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2000년대부터 등장한 신종 넷 우익들이 같은 일본인들한테서도 혐한초딩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반한 및 보수 성향을 지닌 5ch에서도 이런 우익들을 돌려서 비꼬고 있다. 하도 재일 타령을 해서 일본 인구 90%는 재일이라는 개드립도 나오고 있다.
넷 우익의 재일교포가 일본을 뒤에서 조종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논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일교포의 영향력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일반 회사에 취직이 거의 불가능한 재일교포들이 할수 있는 선택지는 일본인이 꺼리는 분야이나, 국적 상관 없이 종사할 수 있는 분야에 한정되었다.
1. 자기가 회사 차려서 사장이 된다. (경제계/정치계)
2. 야쿠자로 들어가 암흑세계에서 산다. (암흑계)
3. 빡세게 공부해서 변호사/학자/의사가 된다. (정치계/법조계/학계)
4. 스스로 책을 쓰는 작가 또는 잡지를 내서 언론인이 된다. (언론계)
5. 노래나 연기, 스포츠 등으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된다. (연예계)
6. 도둑/사기등의 일반 범죄자가 된다.
뿐인데, 이 중에서 1~5는 경제계/암흑계/정치계/법조계/학계/연예계/언론계 등의 권력에 직결되는 부분이였다.
귄력에 관한 부분에 어딜가도 꼭 외국인인 재일교포가 몇명 있으며, 그들이 고위직에 있는 형태는, 정통적인 혈통을 중요시 하는 우파로서는 절대로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고 지문날인거부운동과 지문날인폐지에서 보여준 법조계/학계/언론계/노동계 등의 각종 분야에서 들고 일어나는 모습은 일본 정통 우파로 하여금, 재일교포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2000년대 초에 일본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러한 위기감을 적은 정통 우파의 블로그 등을 본 일본 네티즌이, 이제까지 TV나 신문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한 새로운 정보에 대한 흥분과, 우리나라(일본)가 다른 민족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분노로 음모론이 확대 재생산이 지속된 결과다. 애초에 원래 2ch에서는 이미 그러한 우파의 글을 주워들은 뉴비 우익들이, 여러 게시판에 "이게 진실이다! 눈을 떠라 일본인!"이라며 게시판을 도배하는 민폐꾼이라, 혐오대상이며, 일종의 조롱거리이며 밈적인 존재였지만, 기존의 이공계의 능력자나,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자만이 참가할수 있었던 2ch이, 인터넷의 보급으로 아무나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포교에 내성이 없는 일반인이 먹혀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넷우익이 탄생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넷우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고, 비즈니스화 되면서, 서로 더 자극적으로, 더 선동적으로 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어이없는 음모론으로 파생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 한국인보다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훨씬 나쁜 편이다. 일본에서 이 둘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로 아예 다른 국적, 인종 취급이다. 물론 혐한 우익에게는 양쪽 다 공격대상이지만 기본적으로 여권과 신분증을 받고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들과 다르게 조선인 학교를 다니고 사상교육을 받는 재일 조선인들은 사회에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82] 다만 한국에서는 재일 조선인이든 재일 한국인이든 전부 재일교포로 뭉쳐서 칭하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사건사고도 한국을 향한 혐오문제로 칭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중에 재일 조선인이란 개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로도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재일교포들은 투표권이 없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는 진보정당들은 조총련 계열과 북한 교포들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당연히 보수정당은 그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다소 단호한 입장이다. 당장 한국만해도 대북태도에 따라 여론이 천지차이인데 북한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명하고 자국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계의 적으로 인식하는 일본에서 재일교포와의 접점이 없는 일본인들이 그러한 진보정당과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것이다. 다만 한국에선 그들또한 법적으로 북한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포로 취급하며 그들의 인권과 보호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이 관여된 재일교포 북송이나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해선 북한의 문제지 우리가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라 일본 입장에선 취사선택하는 걸로 본다.[83] 일본의 그런 여론은 일본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매우 이기적인 주장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반성도 안 하는 일본이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 신경 써 달라는 태도야말로 불리할때만 취사선택하는 것이니 일본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일본인이 저지르고 있으니 일본에 책임이 있지만 일본인 납치는 남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니 남한에 책임이 없는 게 당연하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 입장이었어도 중재해 줄 리가 없는 사안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일본에선 의료보험과 여권 등의 처우 개선을 바라면 조총련계를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라고 재일 조선인들을 종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정대세 같은 케이스를 보면 사상교육이란 게 으레 다 그렇듯 재일 조선인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고 본인들의 뿌리가 북한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러한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총련계로 남는 편이 많다.[84] 게다가 재일 한국인이지만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은 매국노라 할 정도로 이미지가 나쁜데 당장 추성훈만 해도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재일 한국인이라 일본 국가대표도, 한국 국가대표도 되지 못해 귀화를 했더니 매국노라면서 지탄을 받은 경우가 있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이 미디어에 묘사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재일교포들은 주로 남한계인 재일한국인이 많다. 재일조선인이 묘사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소수로, 차별 문제 등을 다룬 현실고발성 작품에서 주로 등장한다.
8. 관련용어/문서[편집]
8.1. 양대 단체[편집]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약칭 민단, 올드커머 한국계 단체. 한국 정부와 협력관계이지만 한국 정부에서 독립된 단체이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약칭 총련, 올드커머 북한계 단체. 북한 정부 산하에 있다.)
재일본한국인연합회 (약칭 한인회, 뉴커머 한국계단체. 뉴커머의 단체로 기업인이 중심이다.1980년대에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서 시작됐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8.2. 관련 문서[편집]
대판민국
4.3 사건
고려인
롯데그룹
신한금융그룹
오사카
요코다 메구미
재미교포
재일 중국인
재일 한국어
조선족
조선적
조선학교
파칭코
한국계 일본인
한일혼혈
해외 한국인 학교
화교
United Koreans in Japan
8.3. 유명한 인물 &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편집]
8.3.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편집]
김 류스케 (金龍介) - 재일한국인 변호사들의 단체인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재일변협)의 대표. 특이하게도 성씨는 한국식으로 읽는데 이름은 일본식으로 읽는다.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해오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당연히 넷 우익들의 변호사 징계요청 사건에 휘말린 적도 있다.
김천해 - 좌익 운동가, 일본 공산당 중앙 위원, 재일본조선인연맹 최고 고문. 말년에 북한에 가서 선전활동하다가 숙청된다.
8.3.2. 기업인[편집]
강정호(일본명: 미키 마사히로) - ABC마트 창업주.
김봉학 - 천마물산, 제주은행 창업주.
김상호 - 한일전기 창업주.
서갑호 - (주)방림 창업주
손태장(일본명: 손 타이조) -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 창업주. 손정의의 동생.
신격호 - 롯데그룹 창업주. 일본명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
신동빈 - 신격호의 차남, 현 롯데그룹 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아키오(重光昭夫)
신동주 - 신격호의 장남.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히로유키(重光宏之)
오오카와 히로마사 - 오너즈 플래닝 창업주.
유봉식 - MK택시 창업주[85]
이희건 - 간사이흥은, 신한금융그룹 창업주.
전연식 - 사쿠라 커머스 창업주.
8.3.3. 작가[편집]
김석범
서경식 - 작가. 아래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동경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 '디아스포라 기행'이란 책을 내어 디아스포라 라는 용어를 널리 알렸다.
양석일 - 소설가, 아래의 최양일 감독이 찍은 피와 뼈, 달은 어디에 뜨는가의 원작자.
유미리 - 소설가. 1997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용덕 - 소설가. 2014년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제51회 문예상 수상. 2020년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제42회 노마문예신인상 수상.
정의신 - 연극 극작가 겸 연출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 중에 있다.
최실 - 소설가. 2016년 오다 사쿠노스케상 수상. #
김봉웅[86] - 극작가, 연출가, 소설가
8.3.4. 학자[편집]
금병동 - 역사학자
강덕상 - 역사학자
강상중 - 대학교수, 국제정치학자. 한국 국적자 중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되었고 정년을 남겨두고 2013년 퇴임, 세이가쿠인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도쿄대 명예교수. 대학 시절까지 '나가노 테츠오'란 일본명을 쓰다가 1972년 한국에 온 후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서승 - 위의 서경식과 아래 서준식의 형. 한국 대학원 유학 도중이던 1971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한국에서 양심수로서 19년을 복역했다. 출소한 뒤 2011년까지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서 재직했다 <옥중 19년>이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이성시 - 역사학자, 와세다대학 교수
이진희 - 역사학자. 광개토왕릉비가 변조됐다는 주장을 함.
전길남
한태순 - 정보 이론 학자, 전기 통신 대학 교수 역임. 정보이론 분야의 최고상인 IEEE 클로드 섀넌상 수상.
8.3.5. 배우 & 성우 & 영화인[편집]
강하나 - 재일교포 4세 배우. 귀향에서 정민 역으로 출연하였다.
김인우 - 배우
김향리 - 성우.
공대유 - 배우.
나카무라 유리(한국명: 성우리) - 배우.
성화 - 성우.
송도 - 성우.
박경배(일본명: 아라이 히로후미) - 배우. 재일교포 3세. 성폭행으로 인해 배우 생활은 사실상 망했다.
아란 케이(한국명: 안동자) - 다카라즈카 가극단 남탑 출신의 뮤지컬 배우.
야스다 나루미(한국명: 정성미) - 배우. 일본의 유명 개그맨 콤비 톤네루즈의 키나시 노리타케의 부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미지걸로 데뷔했으며 2010년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의 이모役으로 출연.
오기 케이 -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 뮤지컬 배우. 위의 아란 케이와는 단순히 동명이다.
양영희 - 영화감독.
이상일 - 69, 훌라걸즈,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등 대형 작품을 찍은 영화 감독.
최양일 - 영화 감독.
칸 하나에(한국명: 한영혜) - 배우. 아버지는 서울 출신 한국인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일본식으로 이름을 읽기에 귀화했을 것 같지만 본인의 국적은 한국이라고 한다.
하나오카 짓타
현리 - 배우, 본명 이현리.
홍영희 - 성우
8.3.6. 음악가 & 가수[편집]
JONTE(한국명: 시종태) - EXILE 신멤버 오디션의 결승진출자, 후에 극단 에그자일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에이벡스 소속으로 가수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K
Rihwa : 삿포로시 출신의 재일교포 4세 여가수.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VERBAL(한국명: 유영기) - 가수.
김홍재 - 지휘자.
나카무라 유리(한국명: 성우리) - 2의 배우. 아버지가 재일 3세, 어머니는 한국인
리세(본명: 권리세) : 후쿠시마현 출신. 재일교포 3세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마츠야마 치하루 - 1955년생인 포크 가수.
문리나 - 작사가. 비스트, 포미닛 등의 일본어 가사를 작사했다. 축구선수 다카하기 요지로의 부인이다.
소닌(한국명: 성선임) - 가수.
슈(한국명: 유수영, 일본명: 쿠니미츠 슈) - 걸그룹 S.E.S.의 멤버.
양방언 - 음악가.
오바타 미노루(한국명: 강영철) - 엔카 가수.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37년 재일 한국인 테너 김영길[87] (일본명: 나가타 겐지로)을 동경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음악학교에 입학, 1941년 데뷔 이래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어로 된 군국주의 가요를 부른 탓에 친일인명사전의 문화 예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1979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
요시 - TREASURE의 멤버(한국 국적).
이토 유미(한국명: 이아유미, 일본명: 이토 아유미) - 가수. 걸그룹 슈가의 멤버.
우에하라 준(한국명: 정윤기) - 가수. 보이그룹 ORβIT의 멤버.
최성일 - 바이올리니스트. 주로 사운드 호라이즌에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가하여 한국에선 이를 통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바이올린 솔로 앨범[88]을 내기도 하고 작곡활동도 하는듯. 사운드 호라이즌의 첫 내한공연때 아리랑을 연주하고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키겐 - 기후현 출신. 재일교포 3세. 가수, 작곡가.
8.3.7. 만화가[편집]
정구미(필명: 노란구미) - 웹툰 만화가.
타카하루(pixiv에서의 필명) - 동인작가.
8.3.8. 스포츠 선수[편집]
RYO(한국명: 최영) - 가라테 유파 진무관(신부칸) 무술가. 종합격투기 선수. Spirit MC의 신인발굴프로그램인 '슈퍼 코리안'을 통해서 한국무대에 데뷔한 후 Spirit MC 7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본명으로 활동했으나 주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 남동생[89]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링네임을 RYO로 변경했다. 로드 FC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가네모토 고지 - 한국명 김일우.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였고 지금은 프리로 뛰고있는 프로레슬러. 쥬니어 프로레슬링 레전드로 수신 선더 라이거 등등 유명 선수와의 명경기를 양성했다.
가네무라 킨타로(한국명: 이형호) - FMW, W☆ING, HUSTLE 등을 거친 프로레슬러. 구 FMW 시절에는 믹 폴리나 오니타 아츠시 등과 살벌한 데스매치를 치르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노선 전환 후의 FMW나 HUSTLE 에서는 코믹한 경기를 자주 하는 편. 하지만 성폭력 사건으로 평가는 바닥.
강병수(일본명: 오하라 헤이슈) - 야구선수.
강창남(일본명: 코야마 마사오) - 야구선수.
고원부(일본명: 요시무라 모토토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고지행(일본명: 다카야마 토모유키) - 야구선수.
김공청 - 축구선수.
김명휘 - 전 축구선수, 축구감독.
김림환 - 유도선수.
김무종(일본명: 다키무라 시게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김성근(일본명: 가네바야시 세이콘) - 전 야구선수, 야구감독.
김성길(일본명: 가네모토 세이키치) - 야구선수.
김신부(일본명: 가네시로 노부오) - 야구선수.
김실(일본명: 다나카 미노루) - 야구선수, 야구코치.
김영덕(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 → 가네히코 히데시게) - 야구감독.
김용강(일본명: 아마노 유고) - 야구선수. 프로듀서. 탤런트
김종성 - 축구선수.
김지수 - 유도선수. 2020도쿄올림픽 유도 57kg 국가대표
김태영 - 이종격투기 선수.
량용기 - 축구선수.
리영직 - 축구선수.
리한재 - 축구선수.
박강조 - 축구선수.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한국 국가대표 선수.
박승리 - 축구선수.
박일규 - 축구선수.
사이 료지(한국명: 최영이) - 프로레슬러. 재일 한국인 3세.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ZERO-ONE을 거쳤으며 ZERO-ONE MAX 에서는 챔피언을 하기도 했다.
송재박(일본명: 요시모토 히로시)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은퇴 후 사실상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신용균(일본명: 히라야마 요우나라) - 야구선수, 야구코치, 야구감독.
안권수(일본명: 야스다 콘스) - KBO 리그 두산 베어스 소속 야구선수.
안병준 - 축구선수.
안영학 - 축구선수.
안창림 - 유도선수.
이영구(일본명: 기야마 에이큐) - 야구선수.
이충남(일본명: 야마모토 타다오) - 야구감독
우에다 츠요시(한국명: 주강사)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의 야구선수. 재일교포 4세.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정대세 - 축구선수. 남아공 월드컵에 북한 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 아버지 국적을 이어 본인의 실제 국적은 한국이나 실제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있고 선수 등록은 북한으로 되어있는 등 복잡한 내력을 갖고 있다.
조귀재 - 전 축구선수, 축구감독.
주동식(일본명: 우다 토쇼쿠)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야구지도자.
진창수 - 축구 선수.
최일언(일본명: 야마모토 가즈히코)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한용태 - 축구 선수.
호시노 칸타로 -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 올드팬들에게는 한국 이름인 "여건부"로 더 유명하다.
홍문종(일본명: 도쿠야마 후미무네) - 야구선수.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 徳山昌守): 전 복싱 선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원래 조선적이었으나 2007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일
https://namu.wiki/w/%EC%9E%AC%EC%9D%BC%20%ED%95%9C%EA%B5%AD-%EC%A1%B0%EC%84%A0%EC%9D%B8?from=%EC%9E%AC%EC%9D%BC%EA%B5%90%ED%8F%AC
1. 개요[편집]
재일 한국인-조선인, 즉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 등은 넓은 의미로 보면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 국적자 및 그 자손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전 일본으로 건너와 "특별영주자" 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국계 거주자[2]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말해,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서 사는 한국 국적의 한국인은 "일본 거주 한국인"[3]이라고 불리며, "재일 한국-조선인"과는 구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하며, 일본 내에서는 줄여서 재일(자이니치)[4][5]이 라고도 부른다. 한국 국적[6]을 가지고 있는 재일 한국인과 조선적(朝鮮籍)[7]을 가지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두 부류가 있다.[8] 본 문서는 좁은 의미의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일본 거주 한국인"에 관한 내용까지 통합하여 기술하고 있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국가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재외국민 등록되게 되어있다.[9]
2015년 1월 22일 이전까지는 여권 갱신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으나 재외국민 주민등록제도 실시이후 영주권 취득자, 해외 이주자도 이전처럼 주민등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특별)영주자도 엄연한 외국 국적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이며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귀화하기 싫다면 그냥 투표권이 없는 외국 국적자로 살든가 국적을 가진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2021년 6월의 일본 정부 통계에 의하면, 특별영주자 전체 수 300,441명 의 98.8%인 296,922명이다. [10][11]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았지만 1990년대 이래 들어선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하지만 아직도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재일 외국인 참고.
재일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영상[12]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상.
2. 재일 한국-조선인의 역사[13][편집]
현대 재일동포[14]의 시작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15]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비율로 보면 제주도가 50%, 40%가 경상도, 10%는 나머지일 정도. 실제로 이 두 지방은 일본과 거리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많이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이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들이 그 곳과 가까운 광동성, 푸젠성 출신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사카의 이쿠노구 츠루하시역에는 올드커머 계통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여기의 백제문 현판에는 경상도 사투리와 오사카 사투리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来てえな 見てえな 買うてえな)"라고 써 있을 정도. 부산 자갈치시장에도 똑같은 글귀가 대문에 써 있는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 음식 '전'도 일본에선 서울말 전이 아니라 경상도 방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인 찌짐(チヂミ)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전(요리)'의 일본어 항목은 찌지미(チヂミ)로 작성되어 있다.#
제주도 출신도 일본에 많이 건너갔는데, 본토에서 경상도 인구가 제주도 인구의 20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동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슷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많이 넘어갔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주산업이 농업과 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 출신에 대해 멸시하는 분위기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하게 차별받는다면 일자리나 대우면에서 한반도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본본토가 메리트가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또한 제주가 경제적으로는 열악해도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국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 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인상하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16]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는 우선 대상인 탄광, 군수공장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를 대량의 조선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은 각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치[17]였기 때문에 일본어/한국어에 대한 소통능력의 부족[18], 숙박 인프라의 구축[19]이 따라가주지 못했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우월사상[20]이 동반되어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했고 할당량은 채워야 됐기 때문에 결국 징용을 실시했다.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 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을 이용했다.[21]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이다."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 및 분열되어 민단/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 때 원자폭탄을 맞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22]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23]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제국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24][25]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아니고.[26]
전후 한국으로 귀향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27]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28]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29],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30] 1960년대~1980년대의 독재시절에는 간첩사건을 찾아다니던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서는 재일교포를 한국인이 아니니 잡아서 고문과 허위 자백을 받아도 별 탈이 없어 간첩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호구로 봤고 이 때문에 많은 재일교포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포함해서 재일교포 간첩 사건만 100건이 넘어갔다.# 사회에서도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 외국인 특히 일본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31]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 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포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모았다. [32]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33]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34],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 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35][36] 비참하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은 빨갱이 공작원, 민단은 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37][38]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 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을 멸시해 온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코카쿠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다니던 중[39]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고, 대학 졸업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40]
1952년부터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법' 14조를 제정해 재일동포에게도 지문을 강제 날인토록 했는데, 3년 갱신이 원칙이며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및 금고, 벌금 3만 엔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감시 및 통제수단이라는 지적이 일어 1980년 9월 신주쿠구청에서 교포 1세 한종석이 지문 찍기를 거부했고, 이에 2세들도 동참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으켜 정부에 철폐를 촉구하며 재판도 벌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주기를 1982년 5년, 1987년 1회로 각각 완화시키다가 1993년에 완전 폐지했다.
현재 한국에 재정착한 재일교포들은 현재 제주도, 경상도에 주로 살고 있다. 이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된다. 그리고 한국어하고 일본어 둘 다 유창하게 한다.[41] 그래도 몇몇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기도 한다. 다만 1990년대생 이후의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모국 돕기에 앞장서 온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초중고 교과서에 실어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3.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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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재일 한국-조선인(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도 포함)의 인구는 한국 426,908명, 조선적 27,214명으로 총 454,122명이라 하며, 이중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이 아닌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는 300,786명이고, 한국-조선적 국적의 누적 귀화 허가자 수는 379,878명이라 한다. #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42][43]
재일교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재일교포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다.[44]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는 2ch 관서 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45]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관동 쪽의 재일교포가 많은(많았던) 곳은 도쿄도 고토구의 에다가와와, 카나가와현의 카와사키시이다. 이 2곳은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공장지대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구였다. 오사카와 달리, 이 2곳은 한국적인 것은 없다. 길게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적으로는 해방 전후부터 쭉 살아왔던 오사카와 달리 1964 도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판자촌에 살던 재일교포들을 치안과 경관문제를 이유로 공업지구에 이주시키면서 생긴 곳이다.
당연히 그곳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그 지구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곳곳에 파출소를 설치했다. 깡패마을로 밤마다 폭주족과 야쿠자 및 성범죄가 수두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개발되어 치안이 급격하게 호전되어 현재는 도심부에 편입되었다.
관동 지역의 한인촌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오쿠보로 대표되는 히가시신주쿠 일대가 있다. [46] 원래 이 일대는 빈국 출신의 불법체류자 거주지로 유명했다. 가부키초에 가까워 암흑가와도 연결된 우범지대라 땅값이 저렴했다.
이 일대에 한인촌이 형성된 데 2개의 설이 있는데,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져 재일교포의 고용이 다수 이루어져 노동자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이후 70~80년대 일본에 일하러온 불체자 한국인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다른 국가 출신 체류자들과 달리 이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의 네트워크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국적에 비해 자리잡기가 유리했다. 그렇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에, 90년대 후반부터 한일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고 있다.[47]
이 뉴커머들이 오오쿠보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은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투명 비닐봉투를 구매하여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기하거나 길거리에 버리거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투기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한밤 중에 난동을 부려 현지 일본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한인촌 자체가 축소 되면서 중국인-재중동포(조선족)와 베트남, 네팔, 파키스탄 등의 아시아계 다국적 체류자들이 많다. 할랄 푸드 취급점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아시안타운이라고 해도 될 태세.
한인촌 축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가지였다. 애초에 일본물가로 봐도 너무 높은 바가지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일본인도 한류붐과 희소성을 이유로 납득해왔지만,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음식의 질이 가격에 비해 너무 후져, 대다수의 뉴커머 가게는 단골을 만들지 못하고 한인촌=비싸기만 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한류가 가라앉고, 그나마 있는 한류팬도 차라리 한국에 가버림과 동시에 혐한바람이 불면서 한인촌에 찾아가는 일본인이 줄어 줄줄이 망했다. 반면 현지화가 이뤄진[48] 일본의 차이나타운이 중일관계악화로 가속된 혐중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또다른 뉴커머들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한인촌의 단일화가 있다. 뉴커머 업소들은 완전히 일본에 정착할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짧고 굵게 돈을 벌려고 그때 유행을 이용한 업소를 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일본에서의 1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삼겹살집을 하고, 2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막걸리집을, 3차 한류붐에서는 어디가도 치즈닭갈비집인 상태가 되었다. 이런 거까지 한국 묻지마 창업하고 똑같네... 이러한 단일화는 한인촌의 매력 감소와 더불어 다양성이 부족하게 되어, 한류붐이 지나간 후에는 한꺼번에 망하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와, 빈 업소에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여 한인촌의 지속적인 감소를 불러왔다.
실제로 1차와 2차 한류붐이 지나가면서 한인촌이 급격하게 축소하여 주변 타국가 업소가 진출하였고, 현재 3차한류 붐에 한국인들이 세운 점포 자체는 늘어났지만, 한인촌의 영역은 예전보다 축소되었고 한인촌 가운데에 대놓고 인도/베트남/터키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고, 터키인이 만드는 치즈핫도그집, 베트남인이 만드는 치즈닭갈비집등의 한류고객을 노린 외국인 업소도 많이 보이는 실태였는데, 2018년부터의 급격한 한일관계의 악화, 3차 한류붐의 종식[49], 2020년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외식업의 몰락으로, 이제 한인촌의 3차몰락과 축소, 심각하게는 소멸이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러한 뉴커머 업소들은 전통적인 한국 음식점들[50]이 밀려나게 하고, 최신유행 음식만 나오는 곳이 많은 한인촌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행이 지나면 그 자리를 타국가 출신들이 창업한 점포가 차지하고, 유행이 오면 다 똑같은 업소가 되고를 반복하는 뉴커머 부작용의 연속으로 일본 한인촌 전체가 점점 소멸하는 길로 가고 있다.
재일교포들 중에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교포들도 있다. 뉴커머들에게는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문제를 일으켜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일본에서 망한 인간이 한국으로 돌아가 재기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할 수 있지만, 재일교포에게는 일본이 삶의 터전이며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교포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 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혀버리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앗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51]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어"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코리아국제학원이 창설된 계기도 오사카 지역에 조선학교[52]를 대체할 제대로 된 커리큘럼의 한국학교가 없어서였다고. 특례입시생들이 배우는 커리큘럼과, 현지 재일교포 3세들이 배우는 교육 커리큘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입시제도하고 국어 영어 수학부터가... 그러나 조총련계 조선학교나 민단계 한국학교에 다니는 재일교포는 애초에 소수이며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일반 일본학교에 다닌다. 이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고 보통은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기며 다닌다.
참고로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 정확히는 파칭코 기계를 돌리는 파칭코업장[53]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으며, 파칭코장 체인점 시장점유율 1위의 마루한과 2위의 다이남 모두 한국계 기업이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북한의 핵실험에 일본 파칭코로 번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며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하는데[54] 파칭코에 돈을 갖다바치는건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욕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거기다 이렇게 된건 1970년대까지 재일교포는 일본내에서는 매우 심한 차별을 받았고 일반 기업에서도 채용을 해주지 않는 등 정상적인 직업을 갖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은행업, 상업, 자영업같은 서비스업이나 다른 일본인들이 꺼리는 직업같은 3D 직종이나 유흥업같은 어둠의 직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체능계나 스포츠계로 진로를 정한다면 형편이 나았다. 그 어둠의 직종 중에서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칭코 사업과 야쿠자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6년부터 금지됐던 파칭코 업소가 해금되고 해외에서 돌아온 넘쳐나는 전역군인들이 할일이 없어서 술과 도박에 매진하다가, 이전 까지 공을 하나하나 수동으로 발사하던 파칭코를 마사무라 타케이치(正村竹一)라는 인물이 자동으로 공을 연발하는 연발식 파칭코를 발명하면서 일본사회에 대대적인 파칭코붐이 일어난다. 마사무라 타케이치는 자기도 파칭코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자신의 기계나 사업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전수하였기에 일본 패전으로 본토가 폭격으로 삶의 터가 공터가 되버린 일본인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파칭코사업에 뛰어 들게 되었다. IMF시기의 PC방열풍과 비슷하다
이러한 파칭코 열풍과 당시 파칭코 부품의 마모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결과[55], 마을에 있는 소규모 철물공장에서 파칭코 부품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 하였고, 당시에 3D업종이나, 철물공장을 운영/노동을 하는 재일교포에게도 그 엄청난 양의 수주가 계속 들어오면서 "그렇게 돈이 되는건가? 나도 한 번 해볼까?"하는 식으로 재일교포들도 파칭코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마사무라 타케이치또한 재일교포에게도 자신의 파칭코 사업 노하우나 기계를 전수하였고, 일본에 대 파칭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당시의 파칭코는 순전히 오락기로, 경품으로 당시에는 고가인 담배나 과자를 받을수 있었는데, 파칭코업이 성행하면서 점차 경품을 현금화하기를 바라는 고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칭코업장이 현금을 내거나 자신의 경품을 고객으로 부터 현금으로 다시 사는건 도박으로 간주되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를 우회하는 차원에서 파칭코업소 앞에는 "買人"(바이닌)이라는 파칭코업소에 나오는 손님에게 경품을 사는 사람들이 나왔다. 불량배나 거지, 장애자, 상이군인, 남편을 잃은 미망인, 야쿠자들이 바이닌을 하는 가운데 재일교포 업소는 재일교포끼리 돕는 차원으로 일이 없는 재일교포 아줌마에게 바이닌일을 맡겼었다.
일본 경찰들도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파칭코 업소가 실업자를 줄여주고, 자칫하면 폭도화[56] 재일교포들의 일할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폭도화 되지 않는다라는 차원으로 일부로 눈감아 왔다. 그러다가 야쿠자의 입김이 강해지고 자신의 세력이 아닌 바이닌들을 내쫏고, 파칭코업소에게 보호비 및 경품을 과하게 높게 사가라고 압박하는 행태가 많아지면서, 점차 파칭코라는 업계자체가 어둠의 직종으로 변질되어갔다. 야쿠자의 자금원으로 변질되어버린 결과 1954년에 인기였던 연발식 파칭코가 금지되면서 수많은 파칭코 업소와 회사가 사라지게 되는데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시기에 돌입하면서 일본인 업주나 사장들은 일찌감치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에 취직할수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럴수가 없어서 남아서 파칭코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 일본의 사회적 배경으로는 1954년에 GHQ의 지시하에 이전까지의 중앙집권적인 경찰조직을 각지방마다 쪼개서 민주적인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체 경찰로 변경되었는데, 이러한 조직의 변모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의 중앙경찰에게는 불만이 많는 개편이었다. 1954년, 경찰법이 바뀌면서 경시청(警視庁)가 탄생하는데, 이 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악명높은 특별고등경찰을 만든 내무성의 관계자들이였었고, 2대 경시청장관인 이시이 에이조우(石井栄三)는 "일본 같은 민도가 낮은 국가에서 자치체에게 경찰권을 주면 제대로 치안을 지킬수 있겠냐."하는 지방을 깔보는 발언을 일삼았으며, 나라에서 지방경찰에게 가야할 예산을 도쿄의 경시청이 막아서 혼자 독식함으로서, 일부로 지방경찰이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해와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지방경찰과 경시청의 대립의 씨앗을 뿌려왔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파칭코 업소의 개업 허가는 지방의 서장이 가지고 있기에 경찰의 소중한 자금원이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경찰인력에 비해, 사회주의 운동과 테러의 확산, 야쿠자의 세력확대에 대처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각종 사회약자들을 받아주면서 사회안정에 이바지하는 파칭코까지 몰락하면, 지방경찰로서는 답답할 노릇였는데, 1961년 오사카부경찰 소속경부였던 미즈시마 넨토구(水島年得)가 고안한 방식으로 파칭고 및 바이닌업계에서 야쿠자를 완전히 배제하는 목적으로, 바이닌이 하고 있는 기능을 지방경찰이 허가한 장애자 및 미망인 협력업체에게 일임함으로서 파칭코에서 야쿠자의 영향력을 없애는 방식, 일명 "오사카 방식(大阪方式)"이 생겨났다.
각 파칭코업자도 야쿠자의 보호비를 낼바에는 공익야쿠자(경찰)가 낫다면서 오사카 방식으로 갈아타기 시작하였고, 이 방식이 전국에 퍼지면서 일명 "삼점방식(三店方式)"로 정착하였고, 1954년의 규제이후, 파칭코의 사행성이 많이 낮아짐에 따라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방식으로 탄생했을때, 도쿄의 경시청이 "그거 도박이니까 금지시켜!" 라고 강제 통보했지만, 파칭코 업계에서는 "경찰 좆까" 라면서 개기다가, 위법도 합법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카지노 해금법을 통과시킨 배경에도 일본 도박 사업의 대부분이며, 재일교포들이 중심인 파칭코에 대해 사실상 재편하여 간접적인 제재를 하려는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법안은 외국인 뿐 아니라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카지노 사업까지 포함하고 있어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성화 되면 현재의 일본 파칭코 사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파칭코 시장 규모와 잠재적인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점 등을 들어(일본 파칭코 사업규모는 약 230조 원, 일본의 초기 카지노 예상 시장규모는 약 10조 원 가량)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4.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편집]
5점 만점 기준. 참고로, 여기 있는 평점은 일본인이 만든 '도쿄 DEEP 안내'라는 사이트의 평점을 인용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관점과 재일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것.
도쿄도
신오쿠보 [57] - 신주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3
아자부주반 [58]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2 | 치안: 4
아카사카 [59] - 미나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2
미카와시마 [60] - 아라카와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5 | 치안: 3
히가시우에노 [61]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3 | 치안: 2
우에노나카쵸우 거리 [62] - 다이토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아사쿠사 데라(절)뒤 [63] - 다이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에다가와 1번지 [64] - 고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2 | 치안: 2
킨시쵸/카메이도 [65] - 고토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코이와 [66] - 에도가와구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3 | 치안: 2
산겐챠야 [67] - 세타가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오오야마/오오야구치 [68] - 이타바시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3 | 치안: 3
시바우라 다카하마바시 [69] - 미나토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1 | 치안: 2
니시아라이 [70] - 아다치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3 | 규모: 4 | 치안: 2
카나가와현
오오힌 지구 [71] - 카와사키시 카와사키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5 | 치안: 1
토데4번지 [72] - 카와사키시 사이와이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5 | 규모: 1 | 치안: 1
신마루코 [73] - 카와사키시 나카하라구
구분: 재일교포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2 | 규모: 2 | 치안: 3
사이타마현
니시카와구치(西川口) [74] - 카와구치시
구분: 다민족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3 | 치안: 2
치바현
사카에쵸(栄町) [75] - 치바시 주오구
구분: 뉴커머 | 한국인/재일교포밀도: 4 | 규모: 4 | 치안: 1
출처
그 외 지방에서는 오사카의 츠루하시가 오사카의 한국인 교포 밀집 지역으로 유명하다. 교토에선 히가시쿠조(東九条)와 니시쿠죠(西九条)가 유명하며, 히가시쿠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동구조가 변형되어 히가시쿠조를 '통쿠'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5.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의 언론[편집]
재일 한국-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언론 간행물들은 민단, 총련마다 각각 하나씩 있으며, 신오쿠보에 가보면 무가지가 넘쳐나는 일본의 사정상 한인잡지(월간유학생) 등이 배부되기도 한다. 민단은 민단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총련은 조선신보라는 이름으로 각각 남/북교민용 신문지를 발행중이다.
이와는 무관하게 재일 한국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KNTV라는 방송국이 존재한다. 지상파 방송은 아니고, SM엔터테인먼트 산하 스트림 미디어 코퍼레이션의 비 지상파 위성방송인데 재일 한국인 시청자들을 위해 한국 방송프로그램들을 수입한 다음, 자막을 붙여서 재방영하는게 주요 일과.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 방송 프로그램 소개 모둠에 가까운 구성이었으나, 한류붐의 시작 이후 한국 미디어가 궁금한 한류팬들의 수요가 소소하게 생겨서, 한류팬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을 추가로 갖추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는 듯.
최근에는 KBS World, 엠넷 재팬도 생기고, 독립방송국, 지방방송국이나 BS, CS 방송국에서 허구헌날 틀어주는 게 한국 드라마라 일본 현지인들도 한류 팬이 되기도 한다. 방송사들도 해외전용 유튜브채널로 예능, 드라마를 틀어줘서 교민들도 관심을 갖는 편.
6. 재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혼 및 혼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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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출처 :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붉은색은 재일 조선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 연두색은 일본인 남편과 재일 조선인 아내, 파란색은 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여자의 혼인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76]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77]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노년층)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7.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인식[편집]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가면서 비일본인 아시아계 인물, 그중에서도 특히 화교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 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78] 서브컬쳐에는 아후로디 같은 캐릭터가 있다. 단, 일반 문학에서는 종종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혐한이나 넷 우익들은 자신들의 혐한 사상을 정당화시키려는 수작질의 일환으로 일부러 재일교포와 단순히 한국계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재일 한국인의 숫자는 100만이 넘는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된 인원을 더하면 재일 한국인이 재일 중국인보다 더 많다는 식의 카더라를 마구잡이로 선동했다. 넷 우익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재일 한국인이 일본언론 매체를 조종한다는 주장을 한다.[79] 또한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반발하는 상대방은 몽땅 재일로 몰아간다.[80] 유명한 일화로는 박존파. 공식 집계에서 채 70만도 되지 않는[81] 재일 한국인이 1억 2000만 일본인을 조종한다는 건, 한국에서 채 70만도 안되는 조선족과 재한 중국인이 대한민국을 조종하고 있다는 혐중성 음모론과 거의 동급 수준이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2000년대부터 등장한 신종 넷 우익들이 같은 일본인들한테서도 혐한초딩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반한 및 보수 성향을 지닌 5ch에서도 이런 우익들을 돌려서 비꼬고 있다. 하도 재일 타령을 해서 일본 인구 90%는 재일이라는 개드립도 나오고 있다.
넷 우익의 재일교포가 일본을 뒤에서 조종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논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일교포의 영향력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일반 회사에 취직이 거의 불가능한 재일교포들이 할수 있는 선택지는 일본인이 꺼리는 분야이나, 국적 상관 없이 종사할 수 있는 분야에 한정되었다.
1. 자기가 회사 차려서 사장이 된다. (경제계/정치계)
2. 야쿠자로 들어가 암흑세계에서 산다. (암흑계)
3. 빡세게 공부해서 변호사/학자/의사가 된다. (정치계/법조계/학계)
4. 스스로 책을 쓰는 작가 또는 잡지를 내서 언론인이 된다. (언론계)
5. 노래나 연기, 스포츠 등으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된다. (연예계)
6. 도둑/사기등의 일반 범죄자가 된다.
뿐인데, 이 중에서 1~5는 경제계/암흑계/정치계/법조계/학계/연예계/언론계 등의 권력에 직결되는 부분이였다.
귄력에 관한 부분에 어딜가도 꼭 외국인인 재일교포가 몇명 있으며, 그들이 고위직에 있는 형태는, 정통적인 혈통을 중요시 하는 우파로서는 절대로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고 지문날인거부운동과 지문날인폐지에서 보여준 법조계/학계/언론계/노동계 등의 각종 분야에서 들고 일어나는 모습은 일본 정통 우파로 하여금, 재일교포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2000년대 초에 일본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러한 위기감을 적은 정통 우파의 블로그 등을 본 일본 네티즌이, 이제까지 TV나 신문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한 새로운 정보에 대한 흥분과, 우리나라(일본)가 다른 민족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분노로 음모론이 확대 재생산이 지속된 결과다. 애초에 원래 2ch에서는 이미 그러한 우파의 글을 주워들은 뉴비 우익들이, 여러 게시판에 "이게 진실이다! 눈을 떠라 일본인!"이라며 게시판을 도배하는 민폐꾼이라, 혐오대상이며, 일종의 조롱거리이며 밈적인 존재였지만, 기존의 이공계의 능력자나,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자만이 참가할수 있었던 2ch이, 인터넷의 보급으로 아무나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포교에 내성이 없는 일반인이 먹혀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넷우익이 탄생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넷우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고, 비즈니스화 되면서, 서로 더 자극적으로, 더 선동적으로 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어이없는 음모론으로 파생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 한국인보다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훨씬 나쁜 편이다. 일본에서 이 둘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로 아예 다른 국적, 인종 취급이다. 물론 혐한 우익에게는 양쪽 다 공격대상이지만 기본적으로 여권과 신분증을 받고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들과 다르게 조선인 학교를 다니고 사상교육을 받는 재일 조선인들은 사회에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82] 다만 한국에서는 재일 조선인이든 재일 한국인이든 전부 재일교포로 뭉쳐서 칭하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사건사고도 한국을 향한 혐오문제로 칭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중에 재일 조선인이란 개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로도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재일교포들은 투표권이 없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는 진보정당들은 조총련 계열과 북한 교포들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당연히 보수정당은 그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다소 단호한 입장이다. 당장 한국만해도 대북태도에 따라 여론이 천지차이인데 북한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명하고 자국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계의 적으로 인식하는 일본에서 재일교포와의 접점이 없는 일본인들이 그러한 진보정당과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것이다. 다만 한국에선 그들또한 법적으로 북한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포로 취급하며 그들의 인권과 보호를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이 관여된 재일교포 북송이나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해선 북한의 문제지 우리가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라 일본 입장에선 취사선택하는 걸로 본다.[83] 일본의 그런 여론은 일본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 매우 이기적인 주장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반성도 안 하는 일본이 납북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 신경 써 달라는 태도야말로 불리할때만 취사선택하는 것이니 일본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일본인이 저지르고 있으니 일본에 책임이 있지만 일본인 납치는 남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 아니니 남한에 책임이 없는 게 당연하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 입장이었어도 중재해 줄 리가 없는 사안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일본에선 의료보험과 여권 등의 처우 개선을 바라면 조총련계를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라고 재일 조선인들을 종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정대세 같은 케이스를 보면 사상교육이란 게 으레 다 그렇듯 재일 조선인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고 본인들의 뿌리가 북한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러한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총련계로 남는 편이 많다.[84] 게다가 재일 한국인이지만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은 매국노라 할 정도로 이미지가 나쁜데 당장 추성훈만 해도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재일 한국인이라 일본 국가대표도, 한국 국가대표도 되지 못해 귀화를 했더니 매국노라면서 지탄을 받은 경우가 있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이 미디어에 묘사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재일교포들은 주로 남한계인 재일한국인이 많다. 재일조선인이 묘사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소수로, 차별 문제 등을 다룬 현실고발성 작품에서 주로 등장한다.
8. 관련용어/문서[편집]
8.1. 양대 단체[편집]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약칭 민단, 올드커머 한국계 단체. 한국 정부와 협력관계이지만 한국 정부에서 독립된 단체이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약칭 총련, 올드커머 북한계 단체. 북한 정부 산하에 있다.)
재일본한국인연합회 (약칭 한인회, 뉴커머 한국계단체. 뉴커머의 단체로 기업인이 중심이다.1980년대에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에서 시작됐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8.2. 관련 문서[편집]
대판민국
4.3 사건
고려인
롯데그룹
신한금융그룹
오사카
요코다 메구미
재미교포
재일 중국인
재일 한국어
조선족
조선적
조선학교
파칭코
한국계 일본인
한일혼혈
해외 한국인 학교
화교
United Koreans in Japan
8.3. 유명한 인물 &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편집]
8.3.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편집]
김 류스케 (金龍介) - 재일한국인 변호사들의 단체인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재일변협)의 대표. 특이하게도 성씨는 한국식으로 읽는데 이름은 일본식으로 읽는다.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해오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당연히 넷 우익들의 변호사 징계요청 사건에 휘말린 적도 있다.
김천해 - 좌익 운동가, 일본 공산당 중앙 위원, 재일본조선인연맹 최고 고문. 말년에 북한에 가서 선전활동하다가 숙청된다.
8.3.2. 기업인[편집]
강정호(일본명: 미키 마사히로) - ABC마트 창업주.
김봉학 - 천마물산, 제주은행 창업주.
김상호 - 한일전기 창업주.
서갑호 - (주)방림 창업주
손태장(일본명: 손 타이조) -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 창업주. 손정의의 동생.
신격호 - 롯데그룹 창업주. 일본명 시게미츠 타케오(重光武雄)
신동빈 - 신격호의 차남, 현 롯데그룹 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아키오(重光昭夫)
신동주 - 신격호의 장남.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일본명 시게미츠 히로유키(重光宏之)
오오카와 히로마사 - 오너즈 플래닝 창업주.
유봉식 - MK택시 창업주[85]
이희건 - 간사이흥은, 신한금융그룹 창업주.
전연식 - 사쿠라 커머스 창업주.
8.3.3. 작가[편집]
김석범
서경식 - 작가. 아래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이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동경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 '디아스포라 기행'이란 책을 내어 디아스포라 라는 용어를 널리 알렸다.
양석일 - 소설가, 아래의 최양일 감독이 찍은 피와 뼈, 달은 어디에 뜨는가의 원작자.
유미리 - 소설가. 1997년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용덕 - 소설가. 2014년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제51회 문예상 수상. 2020년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제42회 노마문예신인상 수상.
정의신 - 연극 극작가 겸 연출가.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 중에 있다.
최실 - 소설가. 2016년 오다 사쿠노스케상 수상. #
김봉웅[86] - 극작가, 연출가, 소설가
8.3.4. 학자[편집]
금병동 - 역사학자
강덕상 - 역사학자
강상중 - 대학교수, 국제정치학자. 한국 국적자 중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되었고 정년을 남겨두고 2013년 퇴임, 세이가쿠인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도쿄대 명예교수. 대학 시절까지 '나가노 테츠오'란 일본명을 쓰다가 1972년 한국에 온 후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서승 - 위의 서경식과 아래 서준식의 형. 한국 대학원 유학 도중이던 1971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한국에서 양심수로서 19년을 복역했다. 출소한 뒤 2011년까지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서 재직했다 <옥중 19년>이라는 저서가 출간되었다.
이성시 - 역사학자, 와세다대학 교수
이진희 - 역사학자. 광개토왕릉비가 변조됐다는 주장을 함.
전길남
한태순 - 정보 이론 학자, 전기 통신 대학 교수 역임. 정보이론 분야의 최고상인 IEEE 클로드 섀넌상 수상.
8.3.5. 배우 & 성우 & 영화인[편집]
강하나 - 재일교포 4세 배우. 귀향에서 정민 역으로 출연하였다.
김인우 - 배우
김향리 - 성우.
공대유 - 배우.
나카무라 유리(한국명: 성우리) - 배우.
성화 - 성우.
송도 - 성우.
박경배(일본명: 아라이 히로후미) - 배우. 재일교포 3세. 성폭행으로 인해 배우 생활은 사실상 망했다.
아란 케이(한국명: 안동자) - 다카라즈카 가극단 남탑 출신의 뮤지컬 배우.
야스다 나루미(한국명: 정성미) - 배우. 일본의 유명 개그맨 콤비 톤네루즈의 키나시 노리타케의 부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이미지걸로 데뷔했으며 2010년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의 이모役으로 출연.
오기 케이 -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 뮤지컬 배우. 위의 아란 케이와는 단순히 동명이다.
양영희 - 영화감독.
이상일 - 69, 훌라걸즈,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등 대형 작품을 찍은 영화 감독.
최양일 - 영화 감독.
칸 하나에(한국명: 한영혜) - 배우. 아버지는 서울 출신 한국인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일본식으로 이름을 읽기에 귀화했을 것 같지만 본인의 국적은 한국이라고 한다.
하나오카 짓타
현리 - 배우, 본명 이현리.
홍영희 - 성우
8.3.6. 음악가 & 가수[편집]
JONTE(한국명: 시종태) - EXILE 신멤버 오디션의 결승진출자, 후에 극단 에그자일 소속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에이벡스 소속으로 가수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K
Rihwa : 삿포로시 출신의 재일교포 4세 여가수.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VERBAL(한국명: 유영기) - 가수.
김홍재 - 지휘자.
나카무라 유리(한국명: 성우리) - 2의 배우. 아버지가 재일 3세, 어머니는 한국인
리세(본명: 권리세) : 후쿠시마현 출신. 재일교포 3세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마츠야마 치하루 - 1955년생인 포크 가수.
문리나 - 작사가. 비스트, 포미닛 등의 일본어 가사를 작사했다. 축구선수 다카하기 요지로의 부인이다.
소닌(한국명: 성선임) - 가수.
슈(한국명: 유수영, 일본명: 쿠니미츠 슈) - 걸그룹 S.E.S.의 멤버.
양방언 - 음악가.
오바타 미노루(한국명: 강영철) - 엔카 가수.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37년 재일 한국인 테너 김영길[87] (일본명: 나가타 겐지로)을 동경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음악학교에 입학, 1941년 데뷔 이래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어로 된 군국주의 가요를 부른 탓에 친일인명사전의 문화 예술 부문에 포함되었다. 1979년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
요시 - TREASURE의 멤버(한국 국적).
이토 유미(한국명: 이아유미, 일본명: 이토 아유미) - 가수. 걸그룹 슈가의 멤버.
우에하라 준(한국명: 정윤기) - 가수. 보이그룹 ORβIT의 멤버.
최성일 - 바이올리니스트. 주로 사운드 호라이즌에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가하여 한국에선 이를 통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바이올린 솔로 앨범[88]을 내기도 하고 작곡활동도 하는듯. 사운드 호라이즌의 첫 내한공연때 아리랑을 연주하고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키겐 - 기후현 출신. 재일교포 3세. 가수, 작곡가.
8.3.7. 만화가[편집]
정구미(필명: 노란구미) - 웹툰 만화가.
타카하루(pixiv에서의 필명) - 동인작가.
8.3.8. 스포츠 선수[편집]
RYO(한국명: 최영) - 가라테 유파 진무관(신부칸) 무술가. 종합격투기 선수. Spirit MC의 신인발굴프로그램인 '슈퍼 코리안'을 통해서 한국무대에 데뷔한 후 Spirit MC 7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에는 본명으로 활동했으나 주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 남동생[89]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링네임을 RYO로 변경했다. 로드 FC 미들급 챔피언이었다.
가네모토 고지 - 한국명 김일우. 전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이였고 지금은 프리로 뛰고있는 프로레슬러. 쥬니어 프로레슬링 레전드로 수신 선더 라이거 등등 유명 선수와의 명경기를 양성했다.
가네무라 킨타로(한국명: 이형호) - FMW, W☆ING, HUSTLE 등을 거친 프로레슬러. 구 FMW 시절에는 믹 폴리나 오니타 아츠시 등과 살벌한 데스매치를 치르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노선 전환 후의 FMW나 HUSTLE 에서는 코믹한 경기를 자주 하는 편. 하지만 성폭력 사건으로 평가는 바닥.
강병수(일본명: 오하라 헤이슈) - 야구선수.
강창남(일본명: 코야마 마사오) - 야구선수.
고원부(일본명: 요시무라 모토토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고지행(일본명: 다카야마 토모유키) - 야구선수.
김공청 - 축구선수.
김명휘 - 전 축구선수, 축구감독.
김림환 - 유도선수.
김무종(일본명: 다키무라 시게미) - 야구선수, 야구코치.
김성근(일본명: 가네바야시 세이콘) - 전 야구선수, 야구감독.
김성길(일본명: 가네모토 세이키치) - 야구선수.
김신부(일본명: 가네시로 노부오) - 야구선수.
김실(일본명: 다나카 미노루) - 야구선수, 야구코치.
김영덕(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 → 가네히코 히데시게) - 야구감독.
김용강(일본명: 아마노 유고) - 야구선수. 프로듀서. 탤런트
김종성 - 축구선수.
김지수 - 유도선수. 2020도쿄올림픽 유도 57kg 국가대표
김태영 - 이종격투기 선수.
량용기 - 축구선수.
리영직 - 축구선수.
리한재 - 축구선수.
박강조 - 축구선수.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한국 국가대표 선수.
박승리 - 축구선수.
박일규 - 축구선수.
사이 료지(한국명: 최영이) - 프로레슬러. 재일 한국인 3세.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ZERO-ONE을 거쳤으며 ZERO-ONE MAX 에서는 챔피언을 하기도 했다.
송재박(일본명: 요시모토 히로시)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은퇴 후 사실상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신용균(일본명: 히라야마 요우나라) - 야구선수, 야구코치, 야구감독.
안권수(일본명: 야스다 콘스) - KBO 리그 두산 베어스 소속 야구선수.
안병준 - 축구선수.
안영학 - 축구선수.
안창림 - 유도선수.
이영구(일본명: 기야마 에이큐) - 야구선수.
이충남(일본명: 야마모토 타다오) - 야구감독
우에다 츠요시(한국명: 주강사)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의 야구선수. 재일교포 4세.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정대세 - 축구선수. 남아공 월드컵에 북한 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 아버지 국적을 이어 본인의 실제 국적은 한국이나 실제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있고 선수 등록은 북한으로 되어있는 등 복잡한 내력을 갖고 있다.
조귀재 - 전 축구선수, 축구감독.
주동식(일본명: 우다 토쇼쿠)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야구지도자.
진창수 - 축구 선수.
최일언(일본명: 야마모토 가즈히코)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한용태 - 축구 선수.
호시노 칸타로 -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 올드팬들에게는 한국 이름인 "여건부"로 더 유명하다.
홍문종(일본명: 도쿠야마 후미무네) - 야구선수.
홍창수(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 徳山昌守): 전 복싱 선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원래 조선적이었으나 2007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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