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395년-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튀르키예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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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395년-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튀르키예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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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
동로마 제국(현대 그리스어: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또는 비잔티움 제국(현대 그리스어: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부터 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로 존속한 로마 제국의 연속체이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제국의 공식 국호는 이전과 같은 로마 제국(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바실리아 로메온[*])이었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자국을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중세 그리스어: Ῥωμανία)[1]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중세 그리스어: 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로마 제국의 영역이 줄어들게 되었다. 324년부터 337년까지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재조직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요지인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한 시기에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여러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헤라클리우스 시기에 제국의 행정과 군사가 재조직되고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는 공용어로 채택되었다.[2]
이로 인해 로마 국가는 존속하고 있었고 그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는 점과 그 문화가 라틴 문화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을 구별하고 있다.[1]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을 되풀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제국은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때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안달루시아,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아누스 1세 사후 사산 제국과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은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7세기의 초기 무슬림 정복전쟁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상실했다.[3]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제국의 영토는 발칸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시작된 내란과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4] 그 정점인 마누일 1세의 치세에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도 절대 오래가지 못했다. 앙겔로스 왕조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동로마 제국의 남발칸계 국가들과 라틴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내전으로 국가의 여력을 손실시켜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도 동로마 제국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완전히 멸망했다.[5] 동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트라페주스 포위전으로 멸망했다.[6]
국호
<nowiki /> 그리스의 이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칭하게 된 ‘비잔티움’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7] 그이후 이 표현은 서방 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8]
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인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주 1](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0],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11],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12]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13] 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14]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 그리스인의 제국[주 2]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 제국에서 점차 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15]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의미로 해당 국가를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16]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이리니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기존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 군주들이 동방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17]
그러나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제국을 여전히 로마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제국을 주로 룸( روم , ‘로마’)라고 불렀다.[18][19]
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大秦)을 문맥에 따라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정교회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1081년)에 대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加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로마 제국으로 추정되며, 또는 불림으로도 불렸다. 《송사(宋史)》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림(拂菻)〉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림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역사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20]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21]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22]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23]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24])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25]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26]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27]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28]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29]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타당한 것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형식적이나마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봤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멸망할때까지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적의 영향력하에 들어온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제논는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여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논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의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26]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26]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했으며,[30]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32만 파운드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개혁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엄청난 대프로젝트인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하였다.
서방 고토 수복
<nowiki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7년에 즉위해 로마 제국의 고토를 상당부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일리리아인 농민의 아들로서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31] 532년에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고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하여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바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황제는 니카의 반란에서 살아남았고 봉기한 사람 3만 명이 죽으면서 봉기는 끝났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32] 동고트족 왕 테오다하드가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협정에 실패했으나 교황은 황제가 황후 테오도라의 지지에도 단성론자 안티모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비난 조장에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고토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32]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로마 제국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33]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동로마 제국의 판도.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34]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35]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36]
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장 대부분에서 승리했으나 발칸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와 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도나우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이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 사람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조인했다.[32]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37] 529년 십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6세기에 동부 지역에서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하였고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 같은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만한 특징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기독교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를 발전시켰고 건축가들은 니카 봉기로 파괴된 구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26]
541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발생했다. 가래톳페스트로 알려져 있는 이 역병은 9세기에 스러질 때까지 수백 년간 창궐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면서 유라시아 서부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역병은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역에서 기원한 후 인도나 이란을 지나는 비단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인구가 크게 줄고 경제가 쇠퇴해 크게 약화했다.[38]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었을 때 제국의 재정은 파탄난 상태였고, 유스티누스 2세는 어쩔수없이 사산조 페르시아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했다. 한편 롬바르드족은 제국이 정신없는 사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6세기 말 마우리키우스의 치세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면서 아바르족은 공물로써 회유하려고 했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과 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슬라브족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으며, 제국의 역량이 발칸반도에 집중될 수 있게했다.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축출한 일변[26] 서방 영토에 이민족이 재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행정의 효율성 강화에도 힘썼다.
감소하는 영토
이라클리오스 시대
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난 해결을 위해 아바르족이 잡아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가뜩이나 긴축 정책으로 좋지 않던 그의 인기를 곤두박질치게했고, 포카스라는 장교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면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39] 포카스는 로마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를 목표해 줄곧 심모했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이라클리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40] 이라클리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이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41] 이라클리오스가 한 반격은 성전으로서 성격을 띄며, 기독교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42]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43]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이라클리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44] 이 전쟁으로 양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한 후 발흥한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45]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고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46]
650년의 로마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우마이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47]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됐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주변 요새로 아예 이주했다.[4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 명에서 겨우 40,000여 명에서 70,000여 명으로 줄었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49]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이라클리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 잡는다.[50]
그리스의 불은 로마 제국과 아랍인 간 전쟁기에 로마 제국 해군이 처음으로 썼다.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 도서관,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페르시아와 뒤이어 아랍 세력을 막으려고 발칸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빼내오다 보니 슬라브족이 발칸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51] 670년대에 불가리아인이 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고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려고 파견된 로마 군대가 패배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크 칸과 조약을 조인해 과거엔 명목상이나마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이 새로이 생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 하로 넘어갔다.[52] 687년~688년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그 사람이 어렵게 싸우면서 로마의 패권이 발칸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한 사정을 현로했다.[53]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중과세하고 '외부인들'을 행정직에 앉히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695년에 권력을 잃었으나 처음엔 하자르로 다음에는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705년에 그 사람은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권좌를 되찾고 정적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로 일관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711년에 도시 귀족의 지원으로 결국 재차 쫓겨났으고 이라클리오스 황조도 여기서 폐막했다.[54]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리오스 1세 즉위까지
레온 3세 시대의 로마 제국. 717년경. 줄이 그어진 지역은 아랍에 침공받던 곳을 나타낸다.
이사우리아인 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여 주로 테르벨 칸이 도와준 덕에 그 사람의 군대로 아랍인 32,000여 명을 죽였다. 레온은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본격으로 돌입했다.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대승하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826년 아랍인이 크레타를 점령하고 시칠리아까지 공격했으나 863년 9월 3일에 페트로나스 장군이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알 아크타와 싸워 대승한 일변, 불가리아 황제 크룸의 지도로 불가리아가 제국의 큰 위협으로 재부상했으나 814년에 크룸의 아들 오모르타그가 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조인했다.[55]
8세기와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레온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콘을 금지했으나 제국 전역에서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가 반란했다. 이리니 황후의 노력으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게 정했다. 이리니는 자신과 샤를마뉴의 혼인 협상을 추진했다고 하나 고백자 테오파네스를 좇으면, 황후의 총신인 아이티오스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56] 813년에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가 성상 파괴 정책을 재추진했으나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가 우조하여 이콘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됐다.[57]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사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의 소위 포티오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서 승격에 도전했다.
프랑크 제국의 등장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종주권 요구를 넘어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할 실지로 여겼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들은 774년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이나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한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는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 교황을 신하로 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 황제들의 지시,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인의 군주 샤를마뉴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로마 황실에서는 샤를마뉴의 서로마 황제 제관 수여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샤를마뉴를 찬탈자, 가짜 황제로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거부하되, 프랑크인의 영토와 군사력을 묵살할 수는 없어 황제임은 일단 인정했다. 공식 문서에서 로마 제국은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나 로마 황제가 아닌 프랑크인의 황제, 프랑크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810년대에 와서 샤를마뉴의 딸 중 한 명과 콘스탄티누스 6세 사이의 결혼 동맹이 체결되기 전까지 로마에서는 프랑크 족 출신 군주를 로마 황제로 승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에 다시 로마의 군주들은 그 후계자인 경건왕 루트비히나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를 칭할 때 렉스 또는 레기움이라 칭하여 황제 지위 인정을 거부하였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원정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수여받았을 때에도 역시 로마 제국은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등장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867년 로마 제국
867년에 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구 위상을 회복했으며, 제국 방어하는 군사 구조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타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로마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902년에는 로마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한[58] 후 로마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년),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년), 바실리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반격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리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로마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로마를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로마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키아시를 약탈했으나 로마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은 911년에 크레타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했듯 로마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아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변,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 사람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돼 907년에 로마 제국이 바랑인과의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 위상을 현로했다. 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아니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게 승리하고 (943년), 에데사를 재정복한(944년)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58]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아니스 1세 치미스키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타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아니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 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59] 수차 전쟁 끝에 바실리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최후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바실리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리오스 2세 몰후,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해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58]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리오스 2세 황제.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 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프스의 관을 부여하게 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59]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이 사람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고 3년 후에 요아니스 1세 치미스키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스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회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으나 바실리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바실리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한 후 몇 년간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렸다. 로마 제국은 스페르키오스 전투와 스코페 전투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군대를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해 불가리아의 거점을 조직 성격을 띠게 줄여 나아가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결국 완벽히 패배했다.[60] 야사에서는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맹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최후 요새가 항복했고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로마 제국은 이라클리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59]
동로마 제국의 1025년 영토. 가운데가 하얗게 칠해진 곳은 속국을 의미한다.
키예프 루스와 제국의 관계
850년에서 1100년까지 로마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키예프 루스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다. 양국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키예프 루스의 주요 무역과 문화 교류 상대가 재빨리 되었으나 늘 사이좋게 관계하지는 않았다. 양 세력은 968년에서 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했고 루스인은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하기도 했다. 대개 제국은 루스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루스인은 보통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조인했다.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스가 기독교화하면서 루스와 로마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로마 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스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 건축에 초빙되면서 로마 문화가 전파되었다. 수많은 바랑인들이 로마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한 중에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으로는 아르메니아, 서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까지 였다.[59] 동로마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키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으로 간주한 바실리오스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으나 1025년에 바실리오스는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에 그친다.[59]
11세기에는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 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아야 소피아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수백년간 이어져온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위기와 분열
그 뒤로 로마 제국은 시련을 겪는데 테마 제도가 부실해지고 군대를 소홀히 한 탓이 컸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아니스 치미스키스, 바실리오스 2세는 기민하게 군대 단위(타그마타)를 개혁하여, 방어를 중시하고 시민군을 직업군으로 개편하며, 원정군을 점차 용병으로 충원했으나 용병은 비싼 데다가 9세기에 침략 위험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진지와 값비싼 요새를 유지할 필요성도 감소했다.[61] 바실리오스 2세는 사망 당시 풍부한 재정을 확보해두었으나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바실리오스의 바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아무도 군사상·정치상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제국의 행정은 점차 문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로마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가 상승만 초래했고 금화 가치를 떨어뜨린 판국에 군대는 불필요하게 재정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정치상 위협으로도 비쳐 결국 자국 군대는 정리된 대신 계약에 따라 외국인 용병을 불렀으며,[62] 제국은 새로 등장한 야심찬 외적의 침략에 직면한다. 8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 영토를 침공했다. 1054년에 동서 교회 분열이 일단락되기까지 양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노르만족은 느리지만 꾸준히 로마의 이탈리아 영토로 진출한 일변,[63] 1069년에 로마 제국은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침공으로 달마티아 해안 도시에서의 영향력을 잃었으나[64] 최대 재앙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졌다. 1065년과 1067년에 셀주크 튀르크는 제국 국경을 넘어 아르메니아로 첫 원정을 감행한 사태로 말미암아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이 중시되면서 군사 귀족 출신의 로마노스 디오게니스가 황제로 선출됐다. 1071년 여름에 로마노스는 셀주크 세력을 정규전으로 포섭하고자 동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경이롭게 패하고 생포됐다.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를 예우했고 로마 제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나[6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카일 두카스를 지지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미카일 두카스에 대항해 니키포로스 브리에니오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반발했다. 1081년, 셀주크는 동의 아르메니아에서 서의 비티니아까지 아나톨리아 고원 전체를 석권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88 km 떨어진 니케아에 도읍을 두었다.[65]
콤네노스 왕조와 십자군
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nowiki /> 알렉시오스 1세 및 제1차 십자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만지케르트 패한 후 콤네노스 왕조의 노력으로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66] 콤네노스 황조의 첫째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둘째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사람의 아들 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침략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디라키온과 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로나마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셀주크 술탄이 죽어 술탄국은 내홍으로 갈라졌다. 알렉시오스는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인을 자력으로 급습해 섬멸했다.[26]
테살로니케 조폐소의 첫 동전.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흩어진 제국의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방비 문제에 주목했으나[67] 황제는 셀주크 세력이 차지한 소아시아 고토를 회복하기엔 인력이 불충분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의 사절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서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곤란을 전하고 서방이 돕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계속 무슬림에 지배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은 알렉시오스의 요청이 서유럽을 결합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판단했다.[68]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표식하에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고자 무장 순례 원정을 개시하자고 촉구했다. 서유럽은 매우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26]
알렉시오스는 서방에서 용병 형태로 지원받으리라 예상했고 거대하면서도 훈련되지 않은 서방 군대가 그렇게 빨리 로마 영토로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으며, 황제는 십자군 주력군의 지휘관 팔 명 중에 보에몽을 비롯헤 네 사람이 노르만족인 사실이 불만이었으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야 하게 되자 이 사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한 알렉시오스는 십자군 지휘관들이 성지로 가는 길에 그 사람들이 튀르크인에게서 정복한 어떠한 도시나 영토도 제국에 반환하게 서약해야 한다고 요구한 대신에 자신은 십자군에게 길을 안내하고 그 사람들을 호위했다.[69] 알렉시오스는 수많은 중요 도시와 도서를 비롯해 소아시아 서부 상당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은 안티오케이아 공성전 당시 알렉시오스가 자신을 돕지 않자 당초에 했던 서약이 무효라고 판단한다. (알렉시오스는 안티오케이아로 출정했으나 블루아의 에티엔이 모두 패배했고 원정이 이미 실패했다면서 알렉시오스에게 귀환하자고 설득했다)[70] 보에몽은 안티오케이아 공작이라고 자칭하고서 로마 제국에 곧장 선전포고했으나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을 좇아 알렉시오스의 봉신으로서 책봉에 합의하여 알렉시오스 치세에 노르만족의 위협이 일단락되었다.[71]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nowiki /> 요한네스 2세 및 마누일 1세 콤니노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공성전을 묘사한 중세 필사본.
1118년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아버지를 계승해 제위에 올라 1143년까지 통치했다. 성실하고 심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황제인 요한네스는 반세기 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해 만회에 적임자였다.[72] 경건하면서 온화해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한네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 극히 드물게 도덕 규범에 적합한 지도자였으므로[73] 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25년 치세 동안 요한네스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했고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인을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격퇴했으며[74]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요한네스가 전쟁 덕에 동방에서 힘의 균형이 근본으로 바뀌어 투르크족을 수세로 몰았고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으며[75] 1120년대에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고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임금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한다.[76] 치세 후반기에 동방에서 주로 활동한 요한네스 황제는 멜리테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안티오케이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해 로마 제국의 수위권을 확인했다. 로마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현로하고자 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한 요한네스 황제는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게 원정을 강행했으나 여러 십자군동맹이 배반하여 좌절됐다.[77] 1142년에 요한네스 황제는 안티오케이아를 재압박하여 자신이 한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으나 1143년 봄에 사냥하다가 사고로 죽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하고 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78]
콤네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사남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여러 십자군 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패권을 확보했다.[79]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 내홍 탓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으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안 대부분을 장악한[80]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여러 서방기독교왕국과 수차 동맹했고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81]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한 손실은 이내 만회했고 익년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82]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자체로 모집 가능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구실하는 형편을 나타냈다.[83]
12세기의 부흥
요한네스와 마누엘은 활발한 군사 정책을 전개해 도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활동에 상당한 자원을 동원하면서도 공격하는 태세를 구비한 요새화 정책을 제국 군사 정책 핵심으로 삼았다.[84] 로마 제국은 미크리오케팔론에서 패배했지만, 알렉시오스, 요한네스, 마누엘의 정책 덕에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소아시아에서 국경의 안정을 강화하며 유럽 국경에서도 안정을 확보했다. 1081년경에서 1180년경에 콤네노스 황조의 군대는 제국의 안보를 확립해 로마 문명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85] 덕에 서방 속주는 경제 부흥을 이루어 12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7세기에 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에 침략받은 이래로 콤네노스 시대의 제국은 가장 번성했다.[출처 필요] 12세기에 제국의 인구는 증가했고 새 농지 면적도 확대돼 생산이 증대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의 고고학 자료를 봐도 도시 규모가 커진 데다가 새 도시 수도 상당히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역도 번성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를 위시한 에게 해에 있는 항구와 이어져 십자군 왕국과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서방으로 물자를 운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써 로마 제국과 교역했다.[86]
예술 분야에서도 모자이크화가 부흥하고 지역 건축 학파들이 여러 독특한 양식을 창조해 광범위한 문화상 영향을 전파했다.[87] 12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고전 시대 저자들에 관심이 소생하면서 초기 인본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로마 제국의 다른 것보다 가장 특별히 눈에 띄는 인본주의를 현로한다.[88]
쇠퇴와 분열
앙겔로스 왕조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엘이 죽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고 프랑크인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탓에 섭정은 인기를 없었다.[89]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인 데다가 군대에게 더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지지를 이용해 1182년에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한[90] 안드로니코스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을 제거하고서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알렉시오스 2세를 처단하고 그 사람의 열두 살 난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했다.[90]
제3차 십자군이 이코니온을 점령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출발은 괜찮았다. 특히 그 사람이 제국 행정부를 개혁하고자 쓴 수단은 사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패를 근절하려고 시도했는데 안드로니코스 시대에 매관매직이 없어지고 편향 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으며, 뇌물의 유혹을 막고자 관리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불했다. 지방 관구에서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은 빠르고 괄목할 성과를 보였다.[91] 귀족들은 안드로니코스에게 분노했고 상황이 나빠져 균형을 잃어 처형과 폭력을 일삼는 공포정치로 선회한[92] 안드로니코스는 귀족 세력을 아예 절멸하려고 했다. 귀족과 황제의 권력투쟁은 대규모 살육으로 이어졌고 황제는 정권을 유지하고자 더욱 무자비한 수단을 휘둘렀다.[91]
당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헝가리의 벨러 3세가 크로아티아 땅을 병합했으며,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는 로마 제국에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군대에게 지지받는 그 사람도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가 1185년에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가 배 300척에 병력 80,000 명을 이끌고 제국을 침략했다.[93]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방어하고자 100척 규모 소함대를 동원했으나 황제가 보낸 암살자를 도로 죽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시민에게 지지받아 권력을 잡고 안드로니코스 황제를 죽였다.[94]
이사키오스 2세와 그 사람의 동생 알렉시오스 3세 시대에도 중앙으로 집중화한 제국 행정부와 방어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노르만족은 그리스를 약탈했고 1186년에 블라흐족과 불가르족은 반란해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앙겔로스 황조는 국고를 탕진하고 재정 부패에 시달렸다. 로마 제국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제국 중심에 힘의 공백이 커지면서 나라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1204년 이전에 이미 트라페주스에 일부 콤네노스 황가 출신 귀족이 세운 반독립 국가가 있었다는 사료도 있다.[95]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는 "그리스에 뿌리를 둔 앙겔로스 황조는 이미 약해지고 분열되던 제국의 황폐화를 가속화했다."라고 썼다.[96]
제4차 십자군
<nowiki /> 제4차 십자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 1840년작.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사절과 회람을 통해 새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97] 당초 이 십자군은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를 목표로 했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고자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불충분했으며,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하게 교역하는 관계였으므로, 교황과 십자군 양자는 이해관계가 상이했다.[98]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의 차라 항구를 장악할 수 있게 자신들을 지원하라고 제안해 승낙받았다.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해 1186년에 헝가리의 보호하에 스스로 들어갔다).[99] 1202년 11월에 짧은 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100]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런 계획을 알고 거부했으나 묵살당했지만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진 않았으며 이 사람들의 과오를 조건부로 면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98]
제4차 십자군 이후 제국의 분열. 1204년경.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립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모두 로마 제국 황족과 혼인했다. 필리프의 이복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도와줄 세력을 찾아 유럽에 와서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로마제국과 로마의 양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십자군에 합세해 이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제안했다.[101]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목표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고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교황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나고서야 도착했다.
1203년 여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당도했고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탈출했으며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됐으나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와 이사키오스는 당초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알렉시오스 5세에게 폐위당했다. 1204년 4월 13일에 수도를 결국 점령한 십자군은 사흘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하고 학살했다. 후일 서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이콘, 유물 중 상당수는 베네치아에 나왔다. 코니아테스는 매춘부가 총대주교를 총대주교좌에 앉히기도 했다고 주장한다.[102]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자행한 일을 듣고 분명한 말로 이 사람들을 비난했으나 상황은 이미 교황의 손을 떠난 뒤였는데 교황 사절이 직접 십자군에게 성지로 진격하겠다는 맹서를 면제시켜 준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59][98] 질서가 회복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전에 맺은 합의를 실행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은 황제로 선출되고 베네치아 사람 토마스 모로시니가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분유했지만, 니케아, 트라페준타, 에페이로스에선 로마 제국 세력이 건재했다.[98]
멸망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동로마 제국입니다.
망명 정권
1204년 라틴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서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니케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이 들어섰으며, 트라페준타의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기 몇 주 전에 트라페준타 제국이 성립했다. 세 후계국 중에 에페이로스와 니케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을 만한 기회가 있었으나 니케아 제국은 이후 몇십 년간 생존에 급급했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면 아나톨리아 남부 영토 상당수를 잃는다.[103] 1242년~1243년의 몽골의 침입으로 룸 술탄국이 약해지자 아나톨리아에는 토후들과 가지들이 각자 공국을 이루며 할거해 이 지방에서 로마 제국의 세력도 약화했다.[104] 이때 토후 중 한 사람이었던 오스만 1세가 후일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제국을 세우나 몽골이 침입하여 니케아는 셀주크 세력의 공격을 잠시나마 받지 않게 되어 북에 있는 라틴 제국 공격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로마 제국. 1263년경.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고 에페이로스를 무찌른 덕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치세에 로마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미카엘 황제는 라틴인과 계속전쟁하고자 농민에게 중과세해 분노를 샀다.[105] 제4차 십자군 탓에 피해한 수도를 복구하고자 대규모 건설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런 일은 이성을 상실하고 시비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신뢰하는 가지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소아시아 농민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미카엘은 소아시아 영토를 지키기보다는 제국 영토를 넓히는 쪽을 택해서 얼마간은 성과를 얻었다. 라틴인에게 수도가 재약탈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황제는 교회로 하여금 로마에 복종하게 강제했으나 미카엘과 제국 행정부를 증오하는 농민을 향한 임시변통책일 뿐이었다.[106]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노력하여 로마 제국은 제국의 영광을 돌이키려는 최후 시도했으나 안드로니코스 2세가 용병을 이용하다보니 카탈루냐 용병대가 농촌을 약탈하는 부작용을 낳았는데, 이는 점차 제국 행정부는 민심을 상실했다.[107]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6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인하여 제국은 황폐화되었고 1354년에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이 그곳을 점령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108] 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르고 봉신국으로 삼았으며,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지방 상당수를 정복했다.[109]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의 동지중해 지도.
제국의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해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110]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일로 말미암아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것도 돕지 않은[111]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해 벌판에 마을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가 됐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112]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로 해자를 방어했으나[111]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113]
멸망 이후
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해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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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B%A1%9C%EB%A7%88_%EC%A0%9C%EA%B5%AD
동로마 제국(현대 그리스어: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또는 비잔티움 제국(현대 그리스어: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부터 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로 존속한 로마 제국의 연속체이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제국의 공식 국호는 이전과 같은 로마 제국(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바실리아 로메온[*])이었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자국을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중세 그리스어: Ῥωμανία)[1]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중세 그리스어: 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로마 제국의 영역이 줄어들게 되었다. 324년부터 337년까지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재조직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요지인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한 시기에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여러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헤라클리우스 시기에 제국의 행정과 군사가 재조직되고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는 공용어로 채택되었다.[2]
이로 인해 로마 국가는 존속하고 있었고 그 전통은 유지되었지만, 현대 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는 점과 그 문화가 라틴 문화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을 구별하고 있다.[1]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을 되풀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제국은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때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안달루시아,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아누스 1세 사후 사산 제국과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은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7세기의 초기 무슬림 정복전쟁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상실했다.[3]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제국의 영토는 발칸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시작된 내란과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4] 그 정점인 마누일 1세의 치세에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도 절대 오래가지 못했다. 앙겔로스 왕조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동로마 제국의 남발칸계 국가들과 라틴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내전으로 국가의 여력을 손실시켜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도 동로마 제국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완전히 멸망했다.[5] 동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트라페주스 포위전으로 멸망했다.[6]
국호
<nowiki /> 그리스의 이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칭하게 된 ‘비잔티움’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7] 그이후 이 표현은 서방 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8]
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인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주 1](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0],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11],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12]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13] 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14]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 그리스인의 제국[주 2]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 제국에서 점차 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15]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의미로 해당 국가를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16]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샤를마뉴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렀으므로,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이리니 시대 때 (남성 황제가 아니므로) 기존 로마 제국의 권위는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 군주들이 동방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샤를마뉴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17]
그러나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제국을 여전히 로마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제국을 주로 룸( روم , ‘로마’)라고 불렀다.[18][19]
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大秦)을 문맥에 따라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정교회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1081년)에 대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加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로마 제국으로 추정되며, 또는 불림으로도 불렸다. 《송사(宋史)》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림(拂菻)〉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림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역사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20]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21]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22]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23]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24])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25]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26]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27]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28]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29]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타당한 것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형식적이나마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봤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멸망할때까지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적의 영향력하에 들어온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제논는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여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논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의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26]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26]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했으며,[30]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32만 파운드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개혁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엄청난 대프로젝트인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하였다.
서방 고토 수복
<nowiki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7년에 즉위해 로마 제국의 고토를 상당부 회복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일리리아인 농민의 아들로서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31] 532년에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고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의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하여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바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황제는 니카의 반란에서 살아남았고 봉기한 사람 3만 명이 죽으면서 봉기는 끝났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이 공고해졌다.[32] 동고트족 왕 테오다하드가 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었으나 유스티니아누스와 평화협정에 실패했으나 교황은 황제가 황후 테오도라의 지지에도 단성론자 안티모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비난 조장에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고토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32]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로마 제국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33]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동로마 제국의 판도.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34]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과 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35] 551년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36]
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장 대부분에서 승리했으나 발칸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와 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도나우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이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 사람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조인했다.[32]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37] 529년 십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6세기에 동부 지역에서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하였고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 같은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만한 특징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기독교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를 발전시켰고 건축가들은 니카 봉기로 파괴된 구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26]
541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발생했다. 가래톳페스트로 알려져 있는 이 역병은 9세기에 스러질 때까지 수백 년간 창궐하고 잦아들기를 반복하면서 유라시아 서부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역병은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역에서 기원한 후 인도나 이란을 지나는 비단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인구가 크게 줄고 경제가 쇠퇴해 크게 약화했다.[38]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었을 때 제국의 재정은 파탄난 상태였고, 유스티누스 2세는 어쩔수없이 사산조 페르시아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했다. 한편 롬바르드족은 제국이 정신없는 사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6세기 말 마우리키우스의 치세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면서 아바르족은 공물로써 회유하려고 했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과 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슬라브족들이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으며, 제국의 역량이 발칸반도에 집중될 수 있게했다.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도나우 강 이북으로 축출한 일변[26] 서방 영토에 이민족이 재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행정의 효율성 강화에도 힘썼다.
감소하는 영토
이라클리오스 시대
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난 해결을 위해 아바르족이 잡아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가뜩이나 긴축 정책으로 좋지 않던 그의 인기를 곤두박질치게했고, 포카스라는 장교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면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39] 포카스는 로마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를 목표해 줄곧 심모했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이라클리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40] 이라클리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깊숙이 쳐들어왔으며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십자가를 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41] 이라클리오스가 한 반격은 성전으로서 성격을 띄며, 기독교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42]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43]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이라클리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44] 이 전쟁으로 양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한 후 발흥한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무력하게 되었다.[45]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고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된다.[46]
650년의 로마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년에서 678년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무찔렀고 우마이야 왕조와 30년간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47]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됐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주변 요새로 아예 이주했다.[48]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줄었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인구 500,000여 명에서 겨우 40,000여 명에서 70,000여 명으로 줄었다.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49]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아나톨리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게 되었다. 테마 제도는 이라클리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했으나 7세기에 이 제도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 자리 잡는다.[50]
그리스의 불은 로마 제국과 아랍인 간 전쟁기에 로마 제국 해군이 처음으로 썼다.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 도서관,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페르시아와 뒤이어 아랍 세력을 막으려고 발칸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빼내오다 보니 슬라브족이 발칸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51] 670년대에 불가리아인이 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고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려고 파견된 로마 군대가 패배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크 칸과 조약을 조인해 과거엔 명목상이나마 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이 새로이 생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 하로 넘어갔다.[52] 687년~688년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그 사람이 어렵게 싸우면서 로마의 패권이 발칸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한 사정을 현로했다.[53]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중과세하고 '외부인들'을 행정직에 앉히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695년에 권력을 잃었으나 처음엔 하자르로 다음에는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705년에 그 사람은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권좌를 되찾고 정적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로 일관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711년에 도시 귀족의 지원으로 결국 재차 쫓겨났으고 이라클리오스 황조도 여기서 폐막했다.[54]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리오스 1세 즉위까지
레온 3세 시대의 로마 제국. 717년경. 줄이 그어진 지역은 아랍에 침공받던 곳을 나타낸다.
이사우리아인 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여 주로 테르벨 칸이 도와준 덕에 그 사람의 군대로 아랍인 32,000여 명을 죽였다. 레온은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본격으로 돌입했다.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대승하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826년 아랍인이 크레타를 점령하고 시칠리아까지 공격했으나 863년 9월 3일에 페트로나스 장군이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의 아미르인 우마르 알 아크타와 싸워 대승한 일변, 불가리아 황제 크룸의 지도로 불가리아가 제국의 큰 위협으로 재부상했으나 814년에 크룸의 아들 오모르타그가 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조인했다.[55]
8세기와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레온과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콘을 금지했으나 제국 전역에서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가 반란했다. 이리니 황후의 노력으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게 정했다. 이리니는 자신과 샤를마뉴의 혼인 협상을 추진했다고 하나 고백자 테오파네스를 좇으면, 황후의 총신인 아이티오스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56] 813년에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가 성상 파괴 정책을 재추진했으나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가 우조하여 이콘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됐다.[57]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사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의 소위 포티오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서 승격에 도전했다.
프랑크 제국의 등장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종주권 요구를 넘어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할 실지로 여겼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들은 774년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이나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한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는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 교황을 신하로 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 황제들의 지시,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로마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인의 군주 샤를마뉴에게 황제관을 씌웠다.
로마 황실에서는 샤를마뉴의 서로마 황제 제관 수여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샤를마뉴를 찬탈자, 가짜 황제로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거부하되, 프랑크인의 영토와 군사력을 묵살할 수는 없어 황제임은 일단 인정했다. 공식 문서에서 로마 제국은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나 로마 황제가 아닌 프랑크인의 황제, 프랑크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810년대에 와서 샤를마뉴의 딸 중 한 명과 콘스탄티누스 6세 사이의 결혼 동맹이 체결되기 전까지 로마에서는 프랑크 족 출신 군주를 로마 황제로 승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에 다시 로마의 군주들은 그 후계자인 경건왕 루트비히나 이탈리아인 루트비히를 칭할 때 렉스 또는 레기움이라 칭하여 황제 지위 인정을 거부하였다.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원정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수여받았을 때에도 역시 로마 제국은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등장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867년 로마 제국
867년에 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구 위상을 회복했으며, 제국 방어하는 군사 구조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타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로마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 (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에는 팔레르모를, 842년에는 메시나를, 859년에는 엔나를, 878년에는 시라쿠사를, 900년에는 카타니아를, 902년에는 로마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한[58] 후 로마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 (856년), 멜리테네 아미르를 무찔렀으며 (랄라카온 전투, 863년), 바실리오스 1세는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반격했다. (870년대) 제국은 시칠리아를 잃었으나 바실리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로마 제국 영토로 남는다.
904년에 로마를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제국은 시련에 처했다. 로마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하여 보복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키아시를 약탈했으나 로마 제국은 무슬림 세력에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하지 못했고 이 사람들은 911년에 크레타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했듯 로마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아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변,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이 사람들은 보스포로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돼 907년에 로마 제국이 바랑인과의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막으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 위상을 현로했다. 바랑인을 무찌른 사람은 유명한 장군인 요아니스 쿠르쿠아스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유명하게 승리하고 (943년), 에데사를 재정복한(944년) 일은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와 경축받았다.[58]
병사 출신의 황제인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아니스 1세 치미스키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타와 키프로스를 되찾았다. 요아니스 1세 치세에는 제국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제국 최대 위협인 파티마 왕조가 자리 잡은 동부에서 알레포 토후령과 인근 지역은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59] 수차 전쟁 끝에 바실리오스 1세가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제국은 아랍의 최후 위협 세력을 무찌른다.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바실리오스 2세는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리오스 2세 몰후, 1040년대에 원정대가 출정해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룬다.[58]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불가르인의 학살자 바실리오스 2세 황제.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 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프스의 관을 부여하게 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59]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이 사람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방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고 3년 후에 요아니스 1세 치미스키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스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회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으나 바실리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바실리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한 후 몇 년간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렸다. 로마 제국은 스페르키오스 전투와 스코페 전투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군대를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해 불가리아의 거점을 조직 성격을 띠게 줄여 나아가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결국 완벽히 패배했다.[60] 야사에서는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맹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최후 요새가 항복했고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로마 제국은 이라클리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59]
동로마 제국의 1025년 영토. 가운데가 하얗게 칠해진 곳은 속국을 의미한다.
키예프 루스와 제국의 관계
850년에서 1100년까지 로마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발생한 키예프 루스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다. 양국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키예프 루스의 주요 무역과 문화 교류 상대가 재빨리 되었으나 늘 사이좋게 관계하지는 않았다. 양 세력은 968년에서 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했고 루스인은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하기도 했다. 대개 제국은 루스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루스인은 보통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조인했다.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스가 기독교화하면서 루스와 로마의 관계는 돈독해졌다. 로마 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스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 건축에 초빙되면서 로마 문화가 전파되었다. 수많은 바랑인들이 로마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한 중에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으로는 아르메니아, 서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까지 였다.[59] 동로마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키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으로 간주한 바실리오스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으나 1025년에 바실리오스는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에 그친다.[59]
11세기에는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 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아야 소피아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수백년간 이어져온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위기와 분열
그 뒤로 로마 제국은 시련을 겪는데 테마 제도가 부실해지고 군대를 소홀히 한 탓이 컸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아니스 치미스키스, 바실리오스 2세는 기민하게 군대 단위(타그마타)를 개혁하여, 방어를 중시하고 시민군을 직업군으로 개편하며, 원정군을 점차 용병으로 충원했으나 용병은 비싼 데다가 9세기에 침략 위험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진지와 값비싼 요새를 유지할 필요성도 감소했다.[61] 바실리오스 2세는 사망 당시 풍부한 재정을 확보해두었으나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바실리오스의 바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아무도 군사상·정치상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제국의 행정은 점차 문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로마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가 상승만 초래했고 금화 가치를 떨어뜨린 판국에 군대는 불필요하게 재정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정치상 위협으로도 비쳐 결국 자국 군대는 정리된 대신 계약에 따라 외국인 용병을 불렀으며,[62] 제국은 새로 등장한 야심찬 외적의 침략에 직면한다. 8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 영토를 침공했다. 1054년에 동서 교회 분열이 일단락되기까지 양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노르만족은 느리지만 꾸준히 로마의 이탈리아 영토로 진출한 일변,[63] 1069년에 로마 제국은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침공으로 달마티아 해안 도시에서의 영향력을 잃었으나[64] 최대 재앙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졌다. 1065년과 1067년에 셀주크 튀르크는 제국 국경을 넘어 아르메니아로 첫 원정을 감행한 사태로 말미암아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이 중시되면서 군사 귀족 출신의 로마노스 디오게니스가 황제로 선출됐다. 1071년 여름에 로마노스는 셀주크 세력을 정규전으로 포섭하고자 동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경이롭게 패하고 생포됐다.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를 예우했고 로마 제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나[6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카일 두카스를 지지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미카일 두카스에 대항해 니키포로스 브리에니오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반발했다. 1081년, 셀주크는 동의 아르메니아에서 서의 비티니아까지 아나톨리아 고원 전체를 석권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88 km 떨어진 니케아에 도읍을 두었다.[65]
콤네노스 왕조와 십자군
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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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케르트 패한 후 콤네노스 왕조의 노력으로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66] 콤네노스 황조의 첫째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둘째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사람의 아들 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침략받았는데 이 사람들은 디라키온과 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로나마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셀주크 술탄이 죽어 술탄국은 내홍으로 갈라졌다. 알렉시오스는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인을 자력으로 급습해 섬멸했다.[26]
테살로니케 조폐소의 첫 동전.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흩어진 제국의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방비 문제에 주목했으나[67] 황제는 셀주크 세력이 차지한 소아시아 고토를 회복하기엔 인력이 불충분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의 사절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서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곤란을 전하고 서방이 돕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계속 무슬림에 지배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은 알렉시오스의 요청이 서유럽을 결합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판단했다.[68]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표식하에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고자 무장 순례 원정을 개시하자고 촉구했다. 서유럽은 매우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26]
알렉시오스는 서방에서 용병 형태로 지원받으리라 예상했고 거대하면서도 훈련되지 않은 서방 군대가 그렇게 빨리 로마 영토로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으며, 황제는 십자군 주력군의 지휘관 팔 명 중에 보에몽을 비롯헤 네 사람이 노르만족인 사실이 불만이었으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야 하게 되자 이 사람들을 어느 정도 통제한 알렉시오스는 십자군 지휘관들이 성지로 가는 길에 그 사람들이 튀르크인에게서 정복한 어떠한 도시나 영토도 제국에 반환하게 서약해야 한다고 요구한 대신에 자신은 십자군에게 길을 안내하고 그 사람들을 호위했다.[69] 알렉시오스는 수많은 중요 도시와 도서를 비롯해 소아시아 서부 상당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은 안티오케이아 공성전 당시 알렉시오스가 자신을 돕지 않자 당초에 했던 서약이 무효라고 판단한다. (알렉시오스는 안티오케이아로 출정했으나 블루아의 에티엔이 모두 패배했고 원정이 이미 실패했다면서 알렉시오스에게 귀환하자고 설득했다)[70] 보에몽은 안티오케이아 공작이라고 자칭하고서 로마 제국에 곧장 선전포고했으나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을 좇아 알렉시오스의 봉신으로서 책봉에 합의하여 알렉시오스 치세에 노르만족의 위협이 일단락되었다.[71]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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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공성전을 묘사한 중세 필사본.
1118년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가 아버지를 계승해 제위에 올라 1143년까지 통치했다. 성실하고 심신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황제인 요한네스는 반세기 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해 만회에 적임자였다.[72] 경건하면서 온화해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한네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 극히 드물게 도덕 규범에 적합한 지도자였으므로[73] 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25년 치세 동안 요한네스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했고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인을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격퇴했으며[74]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요한네스가 전쟁 덕에 동방에서 힘의 균형이 근본으로 바뀌어 투르크족을 수세로 몰았고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으며[75] 1120년대에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고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임금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한다.[76] 치세 후반기에 동방에서 주로 활동한 요한네스 황제는 멜리테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안티오케이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해 로마 제국의 수위권을 확인했다. 로마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현로하고자 로마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한 요한네스 황제는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게 원정을 강행했으나 여러 십자군동맹이 배반하여 좌절됐다.[77] 1142년에 요한네스 황제는 안티오케이아를 재압박하여 자신이 한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으나 1143년 봄에 사냥하다가 사고로 죽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하고 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78]
콤네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한네스가 황제로 선택한 사남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하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함께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마누엘은 여러 십자군 국가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고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패권을 확보했다.[79]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1155년에 마누엘은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연합군 내홍 탓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으나 1167년에 마누엘에 헝가리 왕국을 침공해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격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 해 동안 대부분을 장악한[80] 마누엘 황제는 황제와 여러 서방기독교왕국과 수차 동맹했고 제2차 십자군으로 하여금 제국을 별탈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으나[81] 동부에서는 1176년에 마누엘 2세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한 손실은 이내 만회했고 익년에 마누엘의 군대는 "선발된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82] 히엘리온과 레이모케이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한네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를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자체로 모집 가능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 군대가 아직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제구실하는 형편을 나타냈다.[83]
12세기의 부흥
요한네스와 마누엘은 활발한 군사 정책을 전개해 도시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활동에 상당한 자원을 동원하면서도 공격하는 태세를 구비한 요새화 정책을 제국 군사 정책 핵심으로 삼았다.[84] 로마 제국은 미크리오케팔론에서 패배했지만, 알렉시오스, 요한네스, 마누엘의 정책 덕에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소아시아에서 국경의 안정을 강화하며 유럽 국경에서도 안정을 확보했다. 1081년경에서 1180년경에 콤네노스 황조의 군대는 제국의 안보를 확립해 로마 문명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85] 덕에 서방 속주는 경제 부흥을 이루어 12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7세기에 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에 침략받은 이래로 콤네노스 시대의 제국은 가장 번성했다.[출처 필요] 12세기에 제국의 인구는 증가했고 새 농지 면적도 확대돼 생산이 증대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의 고고학 자료를 봐도 도시 규모가 커진 데다가 새 도시 수도 상당히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역도 번성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를 위시한 에게 해에 있는 항구와 이어져 십자군 왕국과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서방으로 물자를 운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써 로마 제국과 교역했다.[86]
예술 분야에서도 모자이크화가 부흥하고 지역 건축 학파들이 여러 독특한 양식을 창조해 광범위한 문화상 영향을 전파했다.[87] 12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고전 시대 저자들에 관심이 소생하면서 초기 인본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로마 제국의 다른 것보다 가장 특별히 눈에 띄는 인본주의를 현로한다.[88]
쇠퇴와 분열
앙겔로스 왕조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엘이 죽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고 프랑크인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탓에 섭정은 인기를 없었다.[89]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결국 정변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인 데다가 군대에게 더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지지를 이용해 1182년에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한[90] 안드로니코스는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을 제거하고서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알렉시오스 2세를 처단하고 그 사람의 열두 살 난 아내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했다.[90]
제3차 십자군이 이코니온을 점령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출발은 괜찮았다. 특히 그 사람이 제국 행정부를 개혁하고자 쓴 수단은 사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패를 근절하려고 시도했는데 안드로니코스 시대에 매관매직이 없어지고 편향 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으며, 뇌물의 유혹을 막고자 관리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불했다. 지방 관구에서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은 빠르고 괄목할 성과를 보였다.[91] 귀족들은 안드로니코스에게 분노했고 상황이 나빠져 균형을 잃어 처형과 폭력을 일삼는 공포정치로 선회한[92] 안드로니코스는 귀족 세력을 아예 절멸하려고 했다. 귀족과 황제의 권력투쟁은 대규모 살육으로 이어졌고 황제는 정권을 유지하고자 더욱 무자비한 수단을 휘둘렀다.[91]
당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헝가리의 벨러 3세가 크로아티아 땅을 병합했으며,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는 로마 제국에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군대에게 지지받는 그 사람도 이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가 1185년에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가 배 300척에 병력 80,000 명을 이끌고 제국을 침략했다.[93]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방어하고자 100척 규모 소함대를 동원했으나 황제가 보낸 암살자를 도로 죽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시민에게 지지받아 권력을 잡고 안드로니코스 황제를 죽였다.[94]
이사키오스 2세와 그 사람의 동생 알렉시오스 3세 시대에도 중앙으로 집중화한 제국 행정부와 방어 체제가 무너지지는 않았으나 노르만족은 그리스를 약탈했고 1186년에 블라흐족과 불가르족은 반란해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앙겔로스 황조는 국고를 탕진하고 재정 부패에 시달렸다. 로마 제국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제국 중심에 힘의 공백이 커지면서 나라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1204년 이전에 이미 트라페주스에 일부 콤네노스 황가 출신 귀족이 세운 반독립 국가가 있었다는 사료도 있다.[95]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는 "그리스에 뿌리를 둔 앙겔로스 황조는 이미 약해지고 분열되던 제국의 황폐화를 가속화했다."라고 썼다.[96]
제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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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 1840년작.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 사절과 회람을 통해 새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97] 당초 이 십자군은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를 목표로 했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고자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불충분했으며,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하게 교역하는 관계였으므로, 교황과 십자군 양자는 이해관계가 상이했다.[98]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의 차라 항구를 장악할 수 있게 자신들을 지원하라고 제안해 승낙받았다.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해 1186년에 헝가리의 보호하에 스스로 들어갔다).[99] 1202년 11월에 짧은 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100]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런 계획을 알고 거부했으나 묵살당했지만 십자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진 않았으며 이 사람들의 과오를 조건부로 면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98]
제4차 십자군 이후 제국의 분열. 1204년경.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립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모두 로마 제국 황족과 혼인했다. 필리프의 이복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도와줄 세력을 찾아 유럽에 와서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로마제국과 로마의 양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십자군에 합세해 이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보급하겠다고 제안했다.[101]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목표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고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교황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나고서야 도착했다.
1203년 여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당도했고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탈출했으며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됐으나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와 이사키오스는 당초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알렉시오스 5세에게 폐위당했다. 1204년 4월 13일에 수도를 결국 점령한 십자군은 사흘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하고 학살했다. 후일 서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이콘, 유물 중 상당수는 베네치아에 나왔다. 코니아테스는 매춘부가 총대주교를 총대주교좌에 앉히기도 했다고 주장한다.[102]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자행한 일을 듣고 분명한 말로 이 사람들을 비난했으나 상황은 이미 교황의 손을 떠난 뒤였는데 교황 사절이 직접 십자군에게 성지로 진격하겠다는 맹서를 면제시켜 준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59][98] 질서가 회복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전에 맺은 합의를 실행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은 황제로 선출되고 베네치아 사람 토마스 모로시니가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분유했지만, 니케아, 트라페준타, 에페이로스에선 로마 제국 세력이 건재했다.[98]
멸망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동로마 제국입니다.
망명 정권
1204년 라틴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서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니케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이 들어섰으며, 트라페준타의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기 몇 주 전에 트라페준타 제국이 성립했다. 세 후계국 중에 에페이로스와 니케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을 만한 기회가 있었으나 니케아 제국은 이후 몇십 년간 생존에 급급했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면 아나톨리아 남부 영토 상당수를 잃는다.[103] 1242년~1243년의 몽골의 침입으로 룸 술탄국이 약해지자 아나톨리아에는 토후들과 가지들이 각자 공국을 이루며 할거해 이 지방에서 로마 제국의 세력도 약화했다.[104] 이때 토후 중 한 사람이었던 오스만 1세가 후일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제국을 세우나 몽골이 침입하여 니케아는 셀주크 세력의 공격을 잠시나마 받지 않게 되어 북에 있는 라틴 제국 공격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로마 제국. 1263년경.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고 에페이로스를 무찌른 덕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치세에 로마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미카엘 황제는 라틴인과 계속전쟁하고자 농민에게 중과세해 분노를 샀다.[105] 제4차 십자군 탓에 피해한 수도를 복구하고자 대규모 건설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이런 일은 이성을 상실하고 시비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신뢰하는 가지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소아시아 농민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미카엘은 소아시아 영토를 지키기보다는 제국 영토를 넓히는 쪽을 택해서 얼마간은 성과를 얻었다. 라틴인에게 수도가 재약탈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황제는 교회로 하여금 로마에 복종하게 강제했으나 미카엘과 제국 행정부를 증오하는 농민을 향한 임시변통책일 뿐이었다.[106]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노력하여 로마 제국은 제국의 영광을 돌이키려는 최후 시도했으나 안드로니코스 2세가 용병을 이용하다보니 카탈루냐 용병대가 농촌을 약탈하는 부작용을 낳았는데, 이는 점차 제국 행정부는 민심을 상실했다.[107]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6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인하여 제국은 황폐화되었고 1354년에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이 그곳을 점령하게 되었고 이것으로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108] 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무찔르고 봉신국으로 삼았으며,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지방 상당수를 정복했다.[109]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의 동지중해 지도.
제국의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으나,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교회 통합을 고려해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 시민과 성직자들은 로마 교회와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110]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일로 말미암아 오스만 제국이 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것도 돕지 않은[111]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해 벌판에 마을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가 됐다. 1453년 4월 2일,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112]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로 해자를 방어했으나[111]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로마 제국의 최후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113]
멸망 이후
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해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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