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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서양 고대 중세 근대 현대 -- 노벨상 수상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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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anada
댓글 0건 조회 260회 작성일 22-09-2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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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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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롭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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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과학-15-16세기    과학혁명-- 16-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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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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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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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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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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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서양 - 나무위키:대문https://namu.wiki › 과학사 › 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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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의 여명기[편집]
2. 고대 과학의 등장[편집]
2.1.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편집]
신화시대를 거치면서 탈레스가 활동하였던 기원전 6~7세기를 거치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자연철학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화시대와는 다르게 자연 현상의 원인을 우연성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자연 안에서 찾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과학이 등장한 배경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신화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에 관한 다양한 자료가 축적되었고, 기술의 발달로 축적된 지식이 있었으며, 부의 축적으로 계급이 등장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류층들이 자연에 대한 사색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는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몇 가지의 사물로 구성되는지를 탐구하였다. 또 사물이 생성하고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화하는 것처럼 만드는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려고도 하였다. 그리고 지진이나 일식과 같은 특수한 자연현상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체계를 만드는 것도 추구하였다. 이는 원인과 방법을 밝히려고 하는 현대의 과학적 태도와도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주장이 다양했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할려고 합리적인 절차를 밟아갔으며, 하다못해 주장을 유리하게 뒷받침하게끔 그럴싸한 이론을 찾아내기라도 했다. 이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추론 및 검증 시도로 넘어간다.

첫 번째 물음,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실재("아르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하려는 시도는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는 물을 근본실재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 그가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가 만물의 기원이라고 본다. 그는 무한정자로부터 모든 것이 나뉘어 우주를 낳았다라고 보았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실재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공기가 팽창하고 수축함에 따라 만물이 만들어져 우주를 구성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기원을 불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수가 우주를 구성하는 실재라고 이해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주장한 것이 물질적인 것이 수에 의해 구성된다고 하였는지 아니면 사물에 수적 속성이 들어있다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를 실재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을 연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2.2. 플라톤의 자연철학[편집]
플라톤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들과 달랐던 점은 윤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과학을 연구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대표적인 저서인 티마이오스는 우주가 도덕적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주를 기하학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4원소 역시 기하학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의 이데아를 따라 우주를 만들려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과 같이 우주는 기하학적인 것이라는 관점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이 신플라톤주의는 르네상스에 부활하여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2.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편집]
플라톤에 뒤이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이후 과학혁명 이전의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으며, 설명 불가능하거나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통해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실패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가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비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과는 달랐던 것은 좀 더 경험중심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원자론자들과 달리 질적인 측면을 강조했으며, 엘레아 학파가 존재의 발생과 변화에 대한 부정한 것에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2.4. 헬레니즘 시기의 과학[편집]
그리스의 학문의 중심지는 아테네였다. 아테네에서는 네 학교가 건립이 되어있었는데 바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제논의 스토아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 정원이었다. 이 네 학교가 갖고 있었던 교육 모델은 그리스 세계와 외에도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의 모델을 수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박물관 겸 연구,교육기관인 무제이온과 도서관을 건설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 시기에 아테네의 학교가 쇠퇴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아테네를 뒤잇는 학문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리케이온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도 몇가지 반론을 내놓기도 하였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사람 중 한명으로, 동물학을 연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500여 종이 넘는 식물들을 꼼꼼하게 기술하였고 분류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동물학 연구에서 보여 주었던 목적론적 관점을, 테오프라스토스가 배격하였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학 분야에 대한 업적은 르네상스기에 테오도로가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 연구'를 번역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근대에 식물학 분야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의 뒤를 이은 것은 스트라톤이었는데 그는 가설을 검증하는데 실험을 사용한 최초의 자연철학자였다. 원자론을 받아들인것도 그의 업적중 하나다.[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발전하는 동안 윤리학에 철학의 모든 측면, 자연철학 역시 종속시킨 두 학파가 등장했는데,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학파에게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인간을 행복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통된 믿음이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과 자연법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는 미지의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것이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해했다. 특히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경험을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원자론에서 나타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을 인식하고 휘어짐 이론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나중에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 주의를 잇게 된다.
2.5. 로마 시기의 과학[편집]
헬레니즘기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독립성과 역동성은 실종되었으나 지적 활기는 여전히 왕성하였고, 후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로마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거치면서 부강한 공화국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은 기원전 200년에 발발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리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150년간 그리스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44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전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문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호라티우스가 말했듯, 로마는 군사와 정치 면에서는 그리스를 점령했지만 예술과 지식면에서는 오히려 그리스인이 정복자였다. 로마의 상류층들은 그리스인들의 문학, 철학, 정치학, 예술에서 이룩한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모방하여 기본 소양으로 삼았다.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에 있어 언어적·지리적 장벽이 있어 모방에 방해를 받았다고 흔히 생각하기 쉬우나,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어로 읽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기원전 2세기까지 로마는 그리스 공동체에 속하였기에,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기도 하였으며, 로마 상류층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같이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또 학문을 배우고자 한 로마 청년이 그리스로 유학을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로마는 그리스 과학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높은 수준에 오르길 원하는 학자들은 그리스어로 작품을 써야했다. 학문에 대해서 라틴어로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쓰는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홀대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틴어로 학문에 대해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라틴어가 쓰인 경우는 청중의 언어장벽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때였는데, 그런 청중들을 위해선 가볍고 대중적인 형태로 각색하여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화 작업에서 그리스인들이 쌓아놓은 성취들은 취사선택되어 해석되었다. 후원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한 학자들은 그리스의 형이상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나 그리스의 수학이나 천문학, 해부학에서 상당히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보다, 주로 그리스인들의 업적 중 실용적이거나 호소력있는 주제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띄었다. 수학이나 의학, 논리학과 수사학은 받아들인 대신에 자연철학은 초보적인 수준에서만 수용되었으며, 여흥거리가 아니면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초기 대중화 작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포시도니오스였다. 아테네에서 수학한 이후 스토아 학교의 교장이 된 그는 기원전 1세기에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만물박사형 학자였다. 역사학, 지리학, 도덕철학, 자연철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그리스어로 집필되었다. 그는 이후의 로마 지성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키케로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였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대중화 운동은 활발해졌는데, 바로,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켈수스,[2] 세네카 등이 당시의 지적 활기에 기여하였다. 포시도니오스의 큰 영향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인 바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라틴어로 저술한 다산 작가로, 포시오도니스의 추종자들에게 천재라고 불린 학자였다. 그는 <학문분과를 다룬 아홉 권의 책>이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했는데, 로마 상류층들에게 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의학, 건축학이라는 9가지의 교양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이는 이후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데에 있어서 준거가 되었으며, 이후 의학과 건축학을 제외한 7가지 과목이 중세 학교의 일곱 교양과목으로 선정되어 중세 대학의 자유학예를 구성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대중화 운동에 의존하면서도 기여하였는데, 그는 여러 철학적 쟁점들에 대한 논쟁에 대한 생생한 해설을 제공하였다.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에피쿠로스 학파의 자연철학을 옹호하였는데, 이 철학시 역시 백과사전의 성격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비트루비우스는 현존하는 고대 유일의 건축학 서적인 <건축에 대하여>를 저술하였으며, 켈수스는 <백과전서>를 집필하였고, 세네카는 기상학을 비롯한 자연철학 전반에 관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대중화 운동에서의 최고봉은 1세기에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대 플리니우스다. <자연사>는 그가 남긴 역작으로, 서문에는 플리니우스는 여러 조수들을 거느리고 백 명이 넘는 이들이 남긴 2천여 권의 책들을 꼼꼼히 읽고 2만여 개의 사실을 추출하였다라고 적혀있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저술 목표는 여러 사실들을 통해 추론된 자연철학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방대한 지식의 창고를 짓는데에 있었다. 그는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모든 자연물을 답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 인류학, 생물학, 식물학, 광물학 등 다양한 분과들을 포괄한 정보를 <자연사> 안에 담아두었다.

위와 같은 백과사전적 편찬방법 외에도 로마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있는 원전들을 주석하는 전통 역시 발달하였다. 마크로비우스는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의 주석서를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해설하면서 포괄적인 자연철학을 다루는 데에 착수하였다. <스키피오의 꿈에 관한 주석>은 이후 중세 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수의 사례이긴 하나 로마에서는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역시 이루어졌다. 키케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아라토스의 <현상>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연구에 열성적일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기원후 2세기 말부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로마의 안정과 평화는 무너지고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그리고 경제의 파탄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50년경에는 변경에서 이민족들의 공격과 침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이 경제상황의 악화는 학문연구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았다. 또한 로마의 동·서부간에 학문 교류가 줄어들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동부와 서부의 지적 연속성은 단절되었다. 서부지역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같이 쓰는 관행은 시들해졌으며, 이제는 그리스어 문헌을 통해 학문을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위협을 감지하고 기본적인 그리스어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대처하고한 여러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칼키디우스는 플라톤의 문헌 중 중요한 서적인 <티마이오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본은 중세의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까지 활동한 보에티우스 역시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당시에 입수 가능한 모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이의 조화를 도모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논리학 작품들을 번역하였으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포르피리오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입문>도 번역하였다. 그러나 6세기의 서로마는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겨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작품들 중 일부 등 몇몇 작품만 남아있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쌓은 업적은 주석서, 교과서, 백과사전, 요약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3. 중세의 과학[편집]
3.1. 기독교와 중세 초의 과학, 교육[편집]
3세기에 주요 종교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등장한 기독교는 로마 제국 말기에 강력한 종교적 역할을 행했다. 이후 중세시기에 지성사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는 과학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중세과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상당히 오래된 관점에서는 로마 말의 기독교가 지배적인 위치로 등장함에 따라 과학의 진보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였기에, 따라서 중세의 약 1000년 간은 르네상스기에 고대과학이 재조명되어 근대과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과학발전의 암흑시대였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며 이처럼 단순하게 볼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3.2. 중세 이슬람의 과학과 영향[편집]
초기 이슬람 신도들은 지식을 숭상했으며 지식을 통해 신에 가까워질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잊혀진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여겼다. 상업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많은 지식이 들어오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과학이 발달하였다. 이런 경향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 때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알 파라비, 알 킨디 등의 철학자에 의해 합리주의가 퍼지면서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븐 시나, 알 콰리즈미, 알 하즘 등이 이때의 학자이다. 당시 이슬람의 학문 연구는 주로 3곳에서 이뤄졌는데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 이집트의 알 하킴, 에스파냐의 툴레도[3] 도서관이 그것이다.

당시의 대표적 수학자로 알 콰리즈미를 들수 있는데 그는 인도의 수학을 가져와 "인도의 계산에 따른 덧셈과 뺄셈에 관한 책"으로 소개했고 대수학을 연구하여 대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이때 최초로 이항정리가 발견되었고 아라비아 숫자가 인도로 들어왔다. 다만 음수를 방정식의 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그의 대수학 저서인 알 자브르가 현재 대수학의 영어어원(Algebra)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오마르 하이얌 등이 3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을 발견하고 유클리드의 평행선 공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었다. 마방진을 유럽에 전파한 것도 이슬람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마방진이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 그것을 중국에서 들여왔었다. 60진법을 버리고 10진법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아라비아 숫자를 들여온것도 이들이다.

의학도 발달하였다. 딩시 이슬람에는 대형 병원이 존재했는데 이 병원은 동시에 대학의 역할도 하였고 그래서 이곳에서 의학이 발전할수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 이븐 시나는 중국의 의학을 들여와[4] 갈레노스와 통합해 "의학정전"을 퍼냈는데 이 책은 향후 400년간 유럽을 지배하는 의학교과서가 된다.[5]

의료윤리가 있었다! 물론 현대적인 의료윤리와 그렇게 비슷하진 않고 대개 의사가 점잖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편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의학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을 4체질로 나누었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동물적 정신,자연적 정신,활기찬 정신의 3가지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들은 동맥혈, 정맥혈,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해서 우울, 다혈절, 화, 무기력이라는 4가지의 체질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광학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알 하젠이라고 알려진 이븐 알 하이삼은 눈에서 빛이 나아가 사물을 볼수 있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하고 사물에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옴으로서 사물을 볼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반사각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외에 다른 학자들은 인간이 빛을 인지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또 화학의 시초가 되는 연금술에도 크게 발전을 기여했다. 애초에 연금술을 의미하는 Alchemy가 아랍어 الكيمياء(Al Kiimiia)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는 훗날 화학(Chemistry)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과학에서 발전이 있었다. 발키 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지리학에 주력했는데 신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알 이드리시 지도도 이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후에 이슬람은 과학이 쇠퇴한다. 이슬람 과학이 쇠퇴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슬람 신학에서 기회인원론을 주장한 아슈아리 학파가 정설로 자리잡은 것에서 알 가잘리(11세기)나 이븐 타이미야(13~14세기)와 같은 일부 신학자들의 저술로에서 나타나는 (혹은 그렇게 주장되는) 이슬람 원리주의로의 회귀 경향[6]이라는 주장에서, 13세기 이후 유행한 조명주의(Illuminationism) 철학에서 외관을 초월한 본질을 추구한 점, 지나친 실용주의로 인해 기초과학이 경시된 것, 서양과의 지적 단절, 칭기스 칸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 오만 가지 설명이 제기되고 있다.[7] 그러나 이들의 과학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르네상스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3. 서구의 학문 부활[편집]
서구의 학문이 부활하기 시작하게 된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가 과학에 개입하면서부터였다. 1277년 아리스토텔레스 과학 금지령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이 품고 있다 유럽이 다시 받아간 바로 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말이다. 자연철학에서 정규과목으로 투쟁끝에 설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관은 당시 중세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관들과 비교해 월등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순식간에 당시 지식인들을 매료시켰고, 이것은 잊혀졌던 그리스 시대의 과학이 시대를 뛰어넘어 중세에 닿게 해주었다. 헌데 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몇 가지 면에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와 배척되는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종교는 순식간에 과학에서 강한 헤게모니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종교의 이름으로 쫓아내게 된 것이었다. 헌데 이러한 종교의 과학 개입은 모순되게도 과학의 부활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으로 설명하면 충분하던 현상들을 드디어 학자들이 다른 세계관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세계를 만들 수 있었음을 선언함으로써 '그렇다면 이런 세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가정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하는 사고 또한 가능해졌다.

그러나 한계 역시 명확하여, 이런 가설은 언제나 어떤 가상의 세계에 대한 기술일 뿐, 현실에 대한 기술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령 프랑스의 수도사 니콜 오렘은 1370년 저서에서 나머지 천체가 정지하고 지구가 자전한다면 지구가 정지히고 천체가 회전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런 그조차도 결국 그 가설이 현실을 기술한다고는 끝내 주장하지 못했으며, 이는 한 세기 이후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 혁명 시기 사상가와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다.

12세기 ~ 14세기 초 중세 후기의 이른바 '중세 문예부흥'기에 발달한 서양 과학은 대략 흑사병을 전후하여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이난 인구 감소로 얼마간 침체기를 맞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들어 유럽의 인구와 경제력이 회복되고, 동로마 제국의 학문이 전래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고,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항해술, 지리학, 박물학 등이 발전하며 유럽 과학은 본격적인 발전 궤도에 올라선다.
3.4. 새로운 과학의 수용과 발전[편집]
4. 르네상스의 과학[편집]
5. 과학혁명기[편집]
5.1. 과학 혁명의 전개[편집]
패러다임의 전개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혁명은 몇몇 소심하기까지한 혁명가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그들의 불을 이어받은 이들에 의해 거대해졌으며, 곧 지금까지 과학을 딛고 있었던 거인, 기존의 패러다임을 붕괴시켰다.

과학사가 웨스트폴은 과학혁명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플라톤의 승리로 보았다. 그는 과학혁명 이후의 과학의 특징을 5가지로 정리했다.
직관적 방법론(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성중심(플라톤)으로의 변화.
과학의 수량화(사물을 양적으로 다루고 수학을 대입하는 경향)
기계론과 인과적 방법론.
데카르트와 베이컨 등이 조합된 새로운 방법론.
형이상학적 이론보다 우선하는 법칙.
5.2. 근대 과학 학회의 성립[편집]
근대 초의 유명한 과학 학회를 들라면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들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은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그 시초가 되는 기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 왕립학회는 그레셤 칼리지에서 시작했다. 고전교육에만 신경을 쏟던 옥스퍼드 대학교에 불만을 품은 과학자들은 훅, 뉴턴 등을 포함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왕립학회를 구성했다. 왕립학회는 이름과는 다르게 왕실의 지원은 없었지만 당대 영국의 최고 과학 학회였다. 그러나 이 학회는 18세기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에는 월광회 등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과학 학회가 성립되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왕실의 지원이 없었던 왕립학회와는 달리 아카데미는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서 최고의 과학기관으로 성장했다. 라부아지에도 여기의 회원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매우 힘든시기를 보내다가 혁명전쟁 동안에 보였던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다시 융성해졌다. 19세기 초 프랑스가 세계에서 과학의 선두를 달렸던 것은 이들의 공이 컸으며 이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의 조직화,학술지,전문화된 과학자 제도 등은 현대 과학의 특성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8]
5.3. 뉴턴 과학의 종합[편집]
6. 근대의 과학 발전[편집]
근대 초에 과학은 한참 성장하고 있는 학문이었다. 많은 과학박물관이 이 때 건립되었고 과학자들도 대중을 향한 과학 홍보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데이비도 이때 활동했으며 알렉산더 틸로치가 최초의 과학잡지인 '필로소피컬 매거진'을 창간하고 뒤이어 '니컬슨'지가 창간되어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대중들도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 반작용으로 유사과학까지 덤을 끼어 흥하게 되었다.[9]

'과학기술을 진흥하여 국력을 키우자.'같은 주장도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산업혁명 초기에 실제로 과학이 산업발전에 끼치는 영향은 적었으나 오켄과 같은 독일,이탈리아 등지의 과학자들은 과학이 국가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예견하였다.[10]
6.1. 뉴턴 과학과 계몽주의 사조[편집]
뉴턴 물리학의 사조는 라플라스에 들어 꽃피게 된다. 라플라스는 실험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는 역학자였는데 그를 중심으로 모호했던 뉴턴 물리학이 체계화되었고, 여기 라그랑주 등이 동참하면서 17세기부터 역학을 중심으로 한 물리학의 전성기가 열렸다.[11] 특히 역학은 측정하고 수학화하는데 수월한 과학이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더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끈 역학 패러다임은 어떤 분야에는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했는데, 열역학이나 전기역학 분야에서는 뉴턴 패러다임이 잘 들어맞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그 분야에서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이는 푸리에가 열역학에는 열역학만의 독특한 물리학이 있다며 뉴턴 패러다임을 일부 거부할때까지 지속되었다.[12]

역학에서 꽃피게 된 뉴턴의 역학 패러다임은 이어 화학이나 생물학같은 인접 학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뉴턴 식의 정량화와 수학화라는 개념은 라부아지에에게 전해져서 근대 화학을 탄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생물학, 그중에서도 발생학에서는 본의아니게 악영향을 끼치는데 바로 전성설을 지지한 것이다. 당시 아기가 어떻게 생기냐는 질문에 대해 전성설과 후성설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성설에서는 정자 속에 있는 아이가 단순히 양분을 얻고 커서 사람이 된다는 지극히 기계적인 설명을 하는 반면, 후성설에서는 씨앗이 무슨 생기같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기계적인 설명을 강조하던 역학 패러다임에 있어서 후성설보다는 전성설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고[13] 그래서 볼프라는 걸출한 학자가 나오기 전까지 전성설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14][15]

한편 뉴턴의 역학이 부흥하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일어난다. 그 중 대표적인게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이다. 과학이 직접 발생한 영국이나 그에 못지않게 과학이 활발했던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일은 과학의 변방지대로서 뉴턴 패러다임이 힘을 쓰지 못했고, 때마침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에 힘입어 괴테, 오켄 등 낭만주의자들이 뉴턴 패러다임에 반대되는 새로운 과학운동을 일으키게 된다.[16] 이들은 뉴턴의 역학이 자연을 수량화하고 정량화하는 과정에서 생기와 같은 수량화할수 없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고, 이들을 다루는 질적인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생물학과 화학 연구에 치중했는데, 왜냐하면 생기나 플로지스톤은 수량화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부아지에께서 친히 플로지스톤을 박살내 주셨다[17]

낭만주의와 함께 이들은 수십년동안 독일의 주류가 되었지만, 과학적 방법이 결여되었던 이들의 과학이 흥할리는 없었고 결국 수십년동안 독일의 과학 발전을 가로막게 되었다. 이후 헬름홀츠라는 걸출한 물리학자가 나타나 물리학은 물론 생물학까지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리비히와 델브뤼크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낭만주의를 밀어내고 수량화를 비롯한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면서, 낭만주의자들의 신과학 운동은 무너지고 독일에 본격적으로 과학이 들어온다.[18]
6.2. 물리학, 화학, 생물학[편집]
6.3. 과학의 전문직업화[편집]
6.4. 과학과 산업기술[편집]
7. 현대의 과학[편집]
이 웹사이트에서 2005-2009년 사이에 과학계에서 일어난 모든 국가간/도시간의 합동 연구 및 협력 등을 세계지도 위에 나타낸 자료를 볼 수 있다. 마치 전세계에서 뻗어나온 선들이 유럽으로 집중되는 듯한 형상이다. 고화질 이미지 전 대륙이 햐얗게 칠해져 있는 유럽과 달리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과 브라질,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중국, 일본, 한국 총 6개 국가만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칠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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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h32_0060_0040_0030_0010

자연 과학의 발달
자연 과학의 발달
19세기에는 유럽 근대 사회가 성립함에 따라 유럽의 근대 문화도 성숙하게 되었다. 유럽 근대의 가장 큰 문화적 소산의 하나는 자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었으며, 19세기는 과학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각 분야에 주목할 업적이 많이 나왔다. 18세기까지 자연 과학의 발달을 주도한 것이 수학과 천문학이었다면, 19세기에는 물리학, 화학, 그리고 특히 생물학에서 놀라운 업적이 나왔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여러 과학자들은 19세기 중엽에 열역학 분야에서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세웠고, 뒤이어 우주의 에너지 전체의 양은 변함이 없지만, 이용 가능의 에너지는 차차 소멸한다는 법칙을 정립하였다. 영국의 패러데이, 프랑스의 앙페르, 독일의 오옴 등은 전기학을 발전시키고, 전파의 개념은 광선에 적용되어 광학을 발달시켰다. 원자론도 발전하여 1860년에는 국제 회의를 통하여 원소의 기준적인 중량표가 마련되고, 19세기 말에는 독일의 뢴트겐이 X선을, 프랑스의 퀴리 부처가 라듐을 각각 발견하였다.

의학에서는 세균학이 발달하여 수술이나 외상 치료에 획기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치료에 성공하고, 독일의 코호는 폐결핵과 콜레라의 균을, 영국의 제너는 종두법을 각각 발견하였다.

생물학에서는 세포 이론이 발전하는 한편, 영국의 다아윈이 진화론을 제시하였다. 다아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생존 경쟁, 적자 생존, 자연 도태의 개념으로써 생물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였는데, 그의 진화론은 비단 생물학계뿐만 아니라, 도덕, 경제 그리고 정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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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의 여명기
2. 고대 과학의 등장
2.1.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
2.2. 플라톤의 자연철학
2.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2.4. 헬레니즘 시기의 과학
2.5. 로마 시기의 과학
3. 중세의 과학
3.1. 기독교와 중세 초의 과학, 교육
3.2. 중세 이슬람의 과학과 영향
3.3. 서구의 학문 부활
3.4. 새로운 과학의 수용과 발전
4. 르네상스의 과학
5. 과학혁명기
5.1. 과학 혁명의 전개
5.2. 근대 과학 학회의 성립
5.3. 뉴턴 과학의 종합
6. 근대의 과학 발전
6.1. 뉴턴 과학과 계몽주의 사조
6.2. 물리학, 화학, 생물학
6.3. 과학의 전문직업화
6.4. 과학과 산업기술
7. 현대의 과학

1. 과학의 여명기[편집]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은 과학의 시작이다. 과학의 정의에 따라 그 시작점이 달라지므로 과학의 시초를 알려면 먼저 과학의 본질적 의미부터 짚어봐야 한다. 이 둘에 대한 관점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관점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나뉜다.

실용주의 측에서는 과학을 인간이 주변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행동이라고 하며, 인간에게 필요한 도구와 기술도 과학에 포함되므로 과학과 기술이 비슷하다 본다. 그 시작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되며 여기서의 과학 지식 또한 측량, 수학, 의학, 천문학 등으로 실용적이었다.

반면 합리주의 측에서는 과학을 합리적 지식으로 자연 현상을 알아내고 설명하는 활동라고 하며, 수학 및 논리학 같이 연결되는 추가 학문을 과학의 범주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기술은 실제 문제 해결을 위한 이론 응용이라고 하여 과학과 구분짓는다.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과학의 정의와 유사한 관점이며 이를 위해 객관적이며 신뢰 가능한 실험, 합리적 추론, 경험적 정당화로 관찰하는 현상의 규칙성과 인과 관계의 발견이 요구된다. 이들은 과학이 체계적, 그리고 합리적인 이해가 이뤄진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2. 고대 과학의 등장[편집]
2.1. 그리스 초기 자연철학[편집]
신화시대를 거치면서 탈레스가 활동하였던 기원전 6~7세기를 거치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자연철학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신화시대와는 다르게 자연 현상의 원인을 우연성이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자연 안에서 찾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과학이 등장한 배경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신화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에 관한 다양한 자료가 축적되었고, 기술의 발달로 축적된 지식이 있었으며, 부의 축적으로 계급이 등장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류층들이 자연에 대한 사색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사는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는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몇 가지의 사물로 구성되는지를 탐구하였다. 또 사물이 생성하고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화하는 것처럼 만드는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려고도 하였다. 그리고 지진이나 일식과 같은 특수한 자연현상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체계를 만드는 것도 추구하였다. 이는 원인과 방법을 밝히려고 하는 현대의 과학적 태도와도 잘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주장이 다양했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할려고 합리적인 절차를 밟아갔으며, 하다못해 주장을 유리하게 뒷받침하게끔 그럴싸한 이론을 찾아내기라도 했다. 이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추론 및 검증 시도로 넘어간다.

첫 번째 물음,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실재("아르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답하려는 시도는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는 물을 근본실재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 그가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가 만물의 기원이라고 본다. 그는 무한정자로부터 모든 것이 나뉘어 우주를 낳았다라고 보았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실재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공기가 팽창하고 수축함에 따라 만물이 만들어져 우주를 구성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기원을 불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수가 우주를 구성하는 실재라고 이해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주장한 것이 물질적인 것이 수에 의해 구성된다고 하였는지 아니면 사물에 수적 속성이 들어있다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피타고라스 학파가 수를 실재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을 연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2.2. 플라톤의 자연철학[편집]
플라톤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철학자였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들과 달랐던 점은 윤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과학을 연구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자연철학에 대한 대표적인 저서인 티마이오스는 우주가 도덕적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주를 기하학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4원소 역시 기하학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의 이데아를 따라 우주를 만들려했기 때문이었다. 플라톤과 같이 우주는 기하학적인 것이라는 관점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이 신플라톤주의는 르네상스에 부활하여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여러 과학자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2.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편집]
플라톤에 뒤이어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이후 과학혁명 이전의 서양과학을 지배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으며, 설명 불가능하거나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통해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실패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가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비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과는 달랐던 것은 좀 더 경험중심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원자론자들과 달리 질적인 측면을 강조했으며, 엘레아 학파가 존재의 발생과 변화에 대한 부정한 것에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2.4. 헬레니즘 시기의 과학[편집]
그리스의 학문의 중심지는 아테네였다. 아테네에서는 네 학교가 건립이 되어있었는데 바로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 제논의 스토아 그리고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 정원이었다. 이 네 학교가 갖고 있었던 교육 모델은 그리스 세계와 외에도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의 모델을 수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박물관 겸 연구,교육기관인 무제이온과 도서관을 건설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 시기에 아테네의 학교가 쇠퇴하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아테네를 뒤잇는 학문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리케이온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면서도 몇가지 반론을 내놓기도 하였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한 사람 중 한명으로, 동물학을 연구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학에 대한 연구를 하였고, 500여 종이 넘는 식물들을 꼼꼼하게 기술하였고 분류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동물학 연구에서 보여 주었던 목적론적 관점을, 테오프라스토스가 배격하였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학 분야에 대한 업적은 르네상스기에 테오도로가 테오프라스토스의 '식물 연구'를 번역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근대에 식물학 분야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의 뒤를 이은 것은 스트라톤이었는데 그는 가설을 검증하는데 실험을 사용한 최초의 자연철학자였다. 원자론을 받아들인것도 그의 업적중 하나다.[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발전하는 동안 윤리학에 철학의 모든 측면, 자연철학 역시 종속시킨 두 학파가 등장했는데,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학파에게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인간을 행복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통된 믿음이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자연과 자연법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것이, 에피쿠로스 학파는 미지의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것이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이해했다. 특히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경험을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원자론에서 나타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을 인식하고 휘어짐 이론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나중에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 주의를 잇게 된다.
2.5. 로마 시기의 과학[편집]
헬레니즘기를 맞이하면서 정치적 독립성과 역동성은 실종되었으나 지적 활기는 여전히 왕성하였고, 후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로마는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거치면서 부강한 공화국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은 기원전 200년에 발발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의 승리로 그리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150년간 그리스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44년에는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전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와 학문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호라티우스가 말했듯, 로마는 군사와 정치 면에서는 그리스를 점령했지만 예술과 지식면에서는 오히려 그리스인이 정복자였다. 로마의 상류층들은 그리스인들의 문학, 철학, 정치학, 예술에서 이룩한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모방하여 기본 소양으로 삼았다. 그리스 문화와의 접촉에 있어 언어적·지리적 장벽이 있어 모방에 방해를 받았다고 흔히 생각하기 쉬우나,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어로 읽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기원전 2세기까지 로마는 그리스 공동체에 속하였기에,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하기도 하였으며, 로마 상류층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같이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또 학문을 배우고자 한 로마 청년이 그리스로 유학을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로마는 그리스 과학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높은 수준에 오르길 원하는 학자들은 그리스어로 작품을 써야했다. 학문에 대해서 라틴어로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쓰는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홀대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틴어로 학문에 대해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라틴어가 쓰인 경우는 청중의 언어장벽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때였는데, 그런 청중들을 위해선 가볍고 대중적인 형태로 각색하여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화 작업에서 그리스인들이 쌓아놓은 성취들은 취사선택되어 해석되었다. 후원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요한 학자들은 그리스의 형이상학이나 인식론과 같은 난해하고 어려운 주제나 그리스의 수학이나 천문학, 해부학에서 상당히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는 것보다, 주로 그리스인들의 업적 중 실용적이거나 호소력있는 주제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띄었다. 수학이나 의학, 논리학과 수사학은 받아들인 대신에 자연철학은 초보적인 수준에서만 수용되었으며, 여흥거리가 아니면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초기 대중화 작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포시도니오스였다. 아테네에서 수학한 이후 스토아 학교의 교장이 된 그는 기원전 1세기에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만물박사형 학자였다. 역사학, 지리학, 도덕철학, 자연철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그리스어로 집필되었다. 그는 이후의 로마 지성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키케로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였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대중화 운동은 활발해졌는데, 바로, 키케로, 루크레티우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켈수스,[2] 세네카 등이 당시의 지적 활기에 기여하였다. 포시도니오스의 큰 영향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인 바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라틴어로 저술한 다산 작가로, 포시오도니스의 추종자들에게 천재라고 불린 학자였다. 그는 <학문분과를 다룬 아홉 권의 책>이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했는데, 로마 상류층들에게 문법, 수사학, 논리학,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의학, 건축학이라는 9가지의 교양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이는 이후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데에 있어서 준거가 되었으며, 이후 의학과 건축학을 제외한 7가지 과목이 중세 학교의 일곱 교양과목으로 선정되어 중세 대학의 자유학예를 구성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대중화 운동에 의존하면서도 기여하였는데, 그는 여러 철학적 쟁점들에 대한 논쟁에 대한 생생한 해설을 제공하였다.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에피쿠로스 학파의 자연철학을 옹호하였는데, 이 철학시 역시 백과사전의 성격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비트루비우스는 현존하는 고대 유일의 건축학 서적인 <건축에 대하여>를 저술하였으며, 켈수스는 <백과전서>를 집필하였고, 세네카는 기상학을 비롯한 자연철학 전반에 관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대중화 운동에서의 최고봉은 1세기에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대 플리니우스다. <자연사>는 그가 남긴 역작으로, 서문에는 플리니우스는 여러 조수들을 거느리고 백 명이 넘는 이들이 남긴 2천여 권의 책들을 꼼꼼히 읽고 2만여 개의 사실을 추출하였다라고 적혀있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저술 목표는 여러 사실들을 통해 추론된 자연철학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방대한 지식의 창고를 짓는데에 있었다. 그는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모든 자연물을 답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 인류학, 생물학, 식물학, 광물학 등 다양한 분과들을 포괄한 정보를 <자연사> 안에 담아두었다.

위와 같은 백과사전적 편찬방법 외에도 로마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있는 원전들을 주석하는 전통 역시 발달하였다. 마크로비우스는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의 주석서를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해설하면서 포괄적인 자연철학을 다루는 데에 착수하였다. <스키피오의 꿈에 관한 주석>은 이후 중세 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수의 사례이긴 하나 로마에서는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 역시 이루어졌다. 키케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아라토스의 <현상>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연구에 열성적일 수 있었던 사회적 조건은 기원후 2세기 말부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로마의 안정과 평화는 무너지고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그리고 경제의 파탄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50년경에는 변경에서 이민족들의 공격과 침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이 경제상황의 악화는 학문연구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았다. 또한 로마의 동·서부간에 학문 교류가 줄어들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나뉘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동부와 서부의 지적 연속성은 단절되었다. 서부지역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같이 쓰는 관행은 시들해졌으며, 이제는 그리스어 문헌을 통해 학문을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위협을 감지하고 기본적인 그리스어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대처하고한 여러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칼키디우스는 플라톤의 문헌 중 중요한 서적인 <티마이오스>의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본은 중세의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까지 활동한 보에티우스 역시 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당시에 입수 가능한 모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이의 조화를 도모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논리학 작품들을 번역하였으며,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포르피리오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입문>도 번역하였다. 그러나 6세기의 서로마는 그리스 과학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겨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작품들 중 일부 등 몇몇 작품만 남아있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쌓은 업적은 주석서, 교과서, 백과사전, 요약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3. 중세의 과학[편집]
3.1. 기독교와 중세 초의 과학, 교육[편집]
3세기에 주요 종교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등장한 기독교는 로마 제국 말기에 강력한 종교적 역할을 행했다. 이후 중세시기에 지성사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는 과학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중세과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상당히 오래된 관점에서는 로마 말의 기독교가 지배적인 위치로 등장함에 따라 과학의 진보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하였기에, 따라서 중세의 약 1000년 간은 르네상스기에 고대과학이 재조명되어 근대과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과학발전의 암흑시대였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며 이처럼 단순하게 볼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3.2. 중세 이슬람의 과학과 영향[편집]
초기 이슬람 신도들은 지식을 숭상했으며 지식을 통해 신에 가까워질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잊혀진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여겼다. 상업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많은 지식이 들어오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과학이 발달하였다. 이런 경향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2대 칼리파인 알 만수르 때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알 파라비, 알 킨디 등의 철학자에 의해 합리주의가 퍼지면서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이븐 시나, 알 콰리즈미, 알 하즘 등이 이때의 학자이다. 당시 이슬람의 학문 연구는 주로 3곳에서 이뤄졌는데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 이집트의 알 하킴, 에스파냐의 툴레도[3] 도서관이 그것이다.

당시의 대표적 수학자로 알 콰리즈미를 들수 있는데 그는 인도의 수학을 가져와 "인도의 계산에 따른 덧셈과 뺄셈에 관한 책"으로 소개했고 대수학을 연구하여 대수학의 기초를 쌓았다. 이때 최초로 이항정리가 발견되었고 아라비아 숫자가 인도로 들어왔다. 다만 음수를 방정식의 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그의 대수학 저서인 알 자브르가 현재 대수학의 영어어원(Algebra)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오마르 하이얌 등이 3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을 발견하고 유클리드의 평행선 공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었다. 마방진을 유럽에 전파한 것도 이슬람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마방진이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 그것을 중국에서 들여왔었다. 60진법을 버리고 10진법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아라비아 숫자를 들여온것도 이들이다.

의학도 발달하였다. 딩시 이슬람에는 대형 병원이 존재했는데 이 병원은 동시에 대학의 역할도 하였고 그래서 이곳에서 의학이 발전할수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 이븐 시나는 중국의 의학을 들여와[4] 갈레노스와 통합해 "의학정전"을 퍼냈는데 이 책은 향후 400년간 유럽을 지배하는 의학교과서가 된다.[5]

의료윤리가 있었다! 물론 현대적인 의료윤리와 그렇게 비슷하진 않고 대개 의사가 점잖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편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의학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을 4체질로 나누었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이 동물적 정신,자연적 정신,활기찬 정신의 3가지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들은 동맥혈, 정맥혈,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해서 우울, 다혈절, 화, 무기력이라는 4가지의 체질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광학에서도 발전이 있었다. 알 하젠이라고 알려진 이븐 알 하이삼은 눈에서 빛이 나아가 사물을 볼수 있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하고 사물에 반사된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옴으로서 사물을 볼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반사각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외에 다른 학자들은 인간이 빛을 인지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또 화학의 시초가 되는 연금술에도 크게 발전을 기여했다. 애초에 연금술을 의미하는 Alchemy가 아랍어 الكيمياء(Al Kiimiia)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는 훗날 화학(Chemistry)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과학에서 발전이 있었다. 발키 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지리학에 주력했는데 신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알 이드리시 지도도 이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후에 이슬람은 과학이 쇠퇴한다. 이슬람 과학이 쇠퇴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슬람 신학에서 기회인원론을 주장한 아슈아리 학파가 정설로 자리잡은 것에서 알 가잘리(11세기)나 이븐 타이미야(13~14세기)와 같은 일부 신학자들의 저술로에서 나타나는 (혹은 그렇게 주장되는) 이슬람 원리주의로의 회귀 경향[6]이라는 주장에서, 13세기 이후 유행한 조명주의(Illuminationism) 철학에서 외관을 초월한 본질을 추구한 점, 지나친 실용주의로 인해 기초과학이 경시된 것, 서양과의 지적 단절, 칭기스 칸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 오만 가지 설명이 제기되고 있다.[7] 그러나 이들의 과학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르네상스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3. 서구의 학문 부활[편집]
서구의 학문이 부활하기 시작하게 된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가 과학에 개입하면서부터였다. 1277년 아리스토텔레스 과학 금지령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이 품고 있다 유럽이 다시 받아간 바로 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말이다. 자연철학에서 정규과목으로 투쟁끝에 설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관은 당시 중세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관들과 비교해 월등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순식간에 당시 지식인들을 매료시켰고, 이것은 잊혀졌던 그리스 시대의 과학이 시대를 뛰어넘어 중세에 닿게 해주었다. 헌데 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몇 가지 면에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와 배척되는 것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종교는 순식간에 과학에서 강한 헤게모니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을 종교의 이름으로 쫓아내게 된 것이었다. 헌데 이러한 종교의 과학 개입은 모순되게도 과학의 부활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으로 설명하면 충분하던 현상들을 드디어 학자들이 다른 세계관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세계를 만들 수 있었음을 선언함으로써 '그렇다면 이런 세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가정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하는 사고 또한 가능해졌다.

그러나 한계 역시 명확하여, 이런 가설은 언제나 어떤 가상의 세계에 대한 기술일 뿐, 현실에 대한 기술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령 프랑스의 수도사 니콜 오렘은 1370년 저서에서 나머지 천체가 정지하고 지구가 자전한다면 지구가 정지히고 천체가 회전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런 그조차도 결국 그 가설이 현실을 기술한다고는 끝내 주장하지 못했으며, 이는 한 세기 이후의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 혁명 시기 사상가와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다.

12세기 ~ 14세기 초 중세 후기의 이른바 '중세 문예부흥'기에 발달한 서양 과학은 대략 흑사병을 전후하여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이난 인구 감소로 얼마간 침체기를 맞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에 들어 유럽의 인구와 경제력이 회복되고, 동로마 제국의 학문이 전래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고,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항해술, 지리학, 박물학 등이 발전하며 유럽 과학은 본격적인 발전 궤도에 올라선다.
3.4. 새로운 과학의 수용과 발전[편집]
4. 르네상스의 과학[편집]
5. 과학혁명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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