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ern_culture 서양유럽문화는 희랍,로마-그리스도교, 게르만--당시 로마교황-가톨릭 교회,프랑크제국-칼제국-AD800년유럽문화의 탄생 . > Europe 유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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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anada
댓글 0건 조회 332회 작성일 22-09-2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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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유럽문화는 희랍,로마-그리스도교, 게르만--당시 로마교황-가톨릭 교회, 프랑크제국- 칼제국이 탄생한 AD800년을 유럽문화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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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ern_culture      https://en.wikipedia.org/wiki/Western_culture

https://contents.premium.naver.com/dahnhistory/knowledge/contents/220311151733652Qv
유럽사 시대구분에서 '이슬람 변수' -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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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urch.catholic.or.kr/kuro3/histroy2.html

서양 중세와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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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와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논하기 전에 중세라는 시대적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항상 연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시대구분 문제는 학자에 따라 편의상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의 특성을 토대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시대구분은 정설이 없고 일반적인 통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통설은 정치의 특성을 토대로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도 연대 문제에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양 중세라면 4,5세기의 게르만 민족의 이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14,15세기 이른바 르네상스 때까지의 약 1천년이란 오랜 기간을 뜻한다.

이 시대의 제분야의 특성을 보면 정치적으로 군주는 명목상의 존재일뿐 제후들이 실권을 행사한 지방분권 시대이며, 경제면에서는 영주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장원경제(莊園經濟) 시대이며, 사회면에서는 계급사회인 봉건시대에 해당되며, 문화면에서는 로마 멸망과 더불어 상호 이질적인 3대 문화권(프랑크, 비잔틴, 이슬람)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문화가 그 기초가 되어 후일 난숙한 물질문명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 중세라면 그리스도교 중심사회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서양문화, 즉 유럽문화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유럽문화는 희랍, 로마적인 서양의 고전문명과 그리스도교적, 게르만적인 3대 요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요소들이 융합된 것은 당시 로마교황의 절대적 지원하에 성립된 프랑크제국 시대로 칼제국이 탄생한 기원후 800년을 유럽문화의 탄생기로 보고 있다.

따라서 유럽문화는 프랑크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이른바 유럽문화권이 새로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그리스도교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이후 유럽사회를 리드하였다. 저명한 가톨릭적 역사가인 도우슨(Christopher Dawson)도 그의 저서(The making of Europe)에서 "유럽의 정신적 생활을 지탱케 한 것이 가톨릭 교회로 서유럽문화의 근본적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말하고 서유럽의 탄생은 역사적 사건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성장하였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유럽은 인종단위로 구성된 인종적 단위도 아니고 지리적 동질성을 보여주는 지리적 단위도 아니고 오직 문화적 단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세계문화의 주류는 서양문화 즉 유럽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근간은 서양 중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문화의 근원은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참된 중세문화를 이해하려면 그리스도교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세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서양문화에는 강고한 정신문화의 기초가 된 그리스도교 정신이 뿌리에 자리잡고 있음으로 해서 오늘의 난숙한 물질문명의 꽃이 아름답게 개화한 것으로 시민문화의 근원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한 도시나 한 민족, 그리고 특정지역을 위한 종교가 아니고 전인류를 위한 보편적 종교로서 자임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너희들은 가서 만국의 백성을 가르치라"고 명하였으며, 성 바오로도 세계동포, 만민평등의 원리를 고조하여 이방인도, 유대인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고 오직 만민 가운데 만사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복음에는 인간의 완성의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법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레오(Leo) 13세는 문화를 정의하여 사람이 개인으로서, 가정의 한사람으로서,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완성에 도달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대하여 몬테스큐(Montesquieu)는 "그리스도교는 내세(來世)의 복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나 이상하게도 현세에서까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감탄의 소리를 발하였다.

또한 파리대학의 쉐농(Chenon)교수는 '가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세계문화에 얼마나 공헌하였는가?'라는 과제를 가지고 무려 30여년 간 고금의 사료를 섭렵하고 반가톨릭 학자들의 논란공격을 세밀히 연구, 검토한 후 1921년 '교회의 사회학적 역할(Le Role Social de Eglise)'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쉐농 교수는 이 책자에서 "서방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받아 쓰러져가는 것을 일으키고 멸망하려는 것을 구원하여 상부상조로서 이른바 가톨릭 문화를 형성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이 문화야말로 발생이래 2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맞는 지금까지 조금도 쇠퇴추락의 빛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 위풍당당히 진보의 길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은 약자를 돕고, 불행한 자를 위로하고, 고독한 자를 즐겁게 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고 이를 게을리 하였을 때 양심의 가책을 입어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끼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좁은 국가주의는 차츰 관후(寬厚)한 세계주의로 전환케 하고, 고루한 적개심은 아름다운 박애심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이를 돌파하여 신생명을 개척해 나아갔으며, 끊임없이 목표를 미래에 두고 진보를 거듭하여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교는 문화의 기초가 되고, 진보의 근원이 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게하였으니 오늘날 세계문화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라고 단언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선현들과 학자들의 말을 간과하더라도 로마멸망 후 혼란된 유럽사회를 바로잡고 서양 중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기름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왔고 미래사회도 그렇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각급 학교에서 사용되는 일부 교재의 잘못된 서술과(가톨릭에 대한 참된 지식의 부족에서, 또는 종파의 상이에서 등) 가톨릭에 대한 잘못된 평가가 있음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참된 역사의 서술과 해석에는 결코 거짓이 없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사실을 밝히는 데 있으며 사료의 고증이 입증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주관적 해석과 해설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성을 띠어야 한다.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순조로울 때도 있었으나 때로는 대립과 공격의 양극화 현상도 없지 않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험난의 역정과 시련을 체험해야만 하였다. 또한 일부의 잘못으로 전체가 그 책임을 감수해야만 하였고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서양 중세라는 긴 세월의 중추역할을 담당한 그리스도 교회도 일부 성직자와 지도층의 세속화된 경향이 전연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를 교회 전체의 타락과 부패로 보는 견해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사회 뿐만 아니라 세속사회 발전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중세교회는 항상 자체의 쇄신과 개혁이 뒤따랐다. 특히 수도원 중심으로 자체 쇄신운동이 전개되어 교회의 세속화 방지에 노력하였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당시 프랑스의 클뤼니(Cluny) 수도원의 세속화 방지운동, 이탈리아의 성 프란치스코회와 스페인의 성 도미니꼬회는 이른바 탁발수도회로서 수도원의 세속화는 봉건영주로서의 토지소유에 있다고 주장하여 세속적 욕망을 배제하고 수도자는 신자들의 희사에 의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이른바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회자체 쇄신운동이 적극 전개되었으며(트리엔트 공의회 등) 예수회의 창설과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가 중세사회 발전에 대한 공헌과 역할에 대한 것은 망각하고 일부의 세속화에 대한 책임을 가톨릭 교회 전체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적반논리의 오류를 스스로 범할 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한때 제왕들의 비속한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고, 교황과 주교의 인선과 서품권을 빼앗긴 결과 세속화가 초래되었고 기강이 해이해져 마침내 암담한 세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오 7세는 분연히 일어나 속인의 서임권(敍任權)을 근절하여 폐해를 일소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의 황금시대인 13세기를 창출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3세, 성왕 루이 9세,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프란치스코 등의 인물을 배출하여 참된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양 중세사회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서 군림하였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도 교황의 권한은 변하지 않았으며 당시 서로마제국을 이룩한 프랑크왕국을 적극 지원하여 미개한 게르만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케 하여 사회혼란을 방지하게 한 것은 유럽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6세기에 출현한 수도원은 세속화의 방지는 물론 부속학교를 통한 학문발전과 사회사업도 그들의 소관임무였고 노동의 신성성을 고취하여 경제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대개 이상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는 서양 중세 사회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면에서 주도족 역할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중세교회는 하나의 국제 국가로서 또는 국제 왕국으로서 초국가로 국제사회의 조정역할까지 수행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띠면서 세속적인 국가에 대해 모범이 되었다. 즉 미개민족에 대한 교화에 힘썼다. 특히 고트족, 반달족, 훈족을 교화시켜 그리스도교 교훈에 따른 인간성을 도야했다. 또한 야만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구출하여 국가사회의 질서회복에 크게 기여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신자들이 제왕이나 제후간에 일어나는 항쟁의 조정을 호소하는 최고 법정역할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국민과 영주와 제왕들의 제요구에 응함으로써 관대한 국제왕국인 동시에 초국가로 군림하여 제왕에게 왕관을 씌워주기도 하고 제왕의 폐위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로마교황의 권위에 대해 국가는 협조하였고 교회도 참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국가와 국민을 도왔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로마 멸망 후 어지러웠던 사회를 바로잡고 1천년이란 길고도 오랜 중세사회의 지주역할을 한 교회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조경래(前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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