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증권---중국에는 상하이 증권거래소와 심 천증권거래소,중국의주식은크게 A주식과 B주식,해외상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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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중국 증시가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 7월 중순. 서울 시내 한 식당에 주한 중국대사관 참사관 일행과 한국거래소 관계자들이 모였다. 중국측의 요청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거래소 관계자는“중국 증시가 겪고 있는 일들이 과거 한국 증시에서 벌어진 것과 유사하니 참고할만한 자료와 경험을 전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거래소측은 미리 준비한 책자 한권을 건넸다. 제목은 ‘1980년 이후 증권시장 안정대책 총람’. 한국 증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3저(低)호황기, 1997년 외환위기, 2000년대 초반 코스닥 버블에 이르기까지 시장의 급등락 과정에서 어떤 대책이 구사됐고, 그 효과는 어떠했는지 상세히 기술한 자료다. 2002년 발간된 오래된 책자지만 어떤 최신 자료보다 현재 중국 증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거래소는 판단했다. 급속한 성장과 버블의 붕괴 과정에서 한국 증시가 겪었던 초창기 시행착오의 교훈이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해 중국측에 전한 조언은 이랬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 인위적 개입은 시장을 왜곡하고 신뢰를 갉아먹는 부작용만 남길 뿐이다. 근본적인 증시 대책은 꾸준히 시장의 수요기반을 넓히고 자생력을 키우는 일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중국 증시는 본격적인 상승장에 진입했다. 당국의 각종 호재성 정책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왔다. 수출 감소와 성장 둔화의 충격을 ‘증시 띄우기’와 내수로 완충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 노선이 작용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개인들은 돈을 빌려 주식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 7월 2000선에 머무르던 상하이 종합지수는 올 6월 5166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게 정점이었다. 펀더멘탈과 유리된 증시는 곧 거친 조정 국면을 맞았다. 이후 한달간 30%가 넘게 급락했다. 중국 당국은 강공책으로 응수했다. 상장기업의 절반이 거래가 정지됐고, 증시 안정기금이 대규모로 투입됐다. 하지만 반짝효과 뿐이었다. 당국이 시장과의 백병전에서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시장의 불안은 더 커졌고, 투매가 투매를 낳았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증시의 모습도 그랬다. 유가·물가·원화 가치가 모두 낮은 수준 ‘3저(低) 호황’에 연 10% 이상의 성장이 이어지면서 증권시장도 비약했다. 1989년 4월 1일 코스피 지수는 1000 고지를 넘어섰다. 1985년초 140에서 4년여만에 무려 622% 상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해 중반부터 증시에 이상 기류가 나타났다. 전국적인 노사분규와 물가 상승, 해외 통상압력 가중에 성장률이 둔화하면서 급격한 하락국면으로 빠졌다. 1991년에는 급기야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유가까지 급등하며 침체국면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거친 부양책이 동원됐다. 이른바 ‘조치의 시대’다. 3대 투신사(한국·대한·국민)에 무제한 주식을 매입하도록 한 1989년의 ‘12·12 조치’가 대표적이다. 정치적 배경의 조치들도 남발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나온‘2·20 조치’가 그 사례다. 효과가 단기적이었던 반면 부작용은 길었다. 부양에 동원된 투신사 경영이 부실해지자 정부는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빌려주는‘특융’을 하기도 했다. 한국 증시가 긴 조정기를 거쳐 다시 1000선을 회복한 건 1994년이었다. 하지만 1995년 母 증시는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외환위기 폭락 사태를 맞아야 했다.
8일 기준으로 상하이 종합지수는 3170선까지 내려앉아 있다. 여전히 변동성이 큰 장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낙하 속도는 조금씩 줄어드는 분위기다. 눈길을 끄는 건 중국 당국의 대응 방식이 초기에 비해선 한결 ‘시장 친화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 투자자에 배당소득세를 면제해주고, 시장의 개혁개방을 추진하기로 한 건 본격적 체질 개선에 나서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시장의 급변동을 완화하는 장치로 주요 거래소들이 채택하고 있는 ‘서킷 브레이커’제도을 도입도 거론되고 있다. 한국에선 1998년 가격제한 폭을 늘리면서 보완장치로 도입됐다.
중국 증시의 상황을 꾸준히 모니터링해온 우리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중국 증시의 상승이 다소 과도했던 만큼 시기가 문제였을 뿐 조정은 불가피했던 상황이었다”며 “이를 인위적으로 틀어막으려는 대응 방식이 오히려 부작용을 키운 측면이 있고, 계단식 급락을 유발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증시의 성장 경로를 통해 본다면 중국이 취할 수 있는 다음 대응은 무엇일까. 거래소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가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중국 증시의 구조적 불안정 요인”이라면서 “중국대사관과의 만남에선 외국인 투자자의 참여를 넓히는 게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http://joongang.joins.com/article/780/18623780.html?ctg=1100&cloc=joongang|home|news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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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중국 증시가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 7월 중순. 서울 시내 한 식당에 주한 중국대사관 참사관 일행과 한국거래소 관계자들이 모였다. 중국측의 요청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거래소 관계자는“중국 증시가 겪고 있는 일들이 과거 한국 증시에서 벌어진 것과 유사하니 참고할만한 자료와 경험을 전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거래소측은 미리 준비한 책자 한권을 건넸다. 제목은 ‘1980년 이후 증권시장 안정대책 총람’. 한국 증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3저(低)호황기, 1997년 외환위기, 2000년대 초반 코스닥 버블에 이르기까지 시장의 급등락 과정에서 어떤 대책이 구사됐고, 그 효과는 어떠했는지 상세히 기술한 자료다. 2002년 발간된 오래된 책자지만 어떤 최신 자료보다 현재 중국 증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거래소는 판단했다. 급속한 성장과 버블의 붕괴 과정에서 한국 증시가 겪었던 초창기 시행착오의 교훈이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해 중국측에 전한 조언은 이랬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 인위적 개입은 시장을 왜곡하고 신뢰를 갉아먹는 부작용만 남길 뿐이다. 근본적인 증시 대책은 꾸준히 시장의 수요기반을 넓히고 자생력을 키우는 일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중국 증시는 본격적인 상승장에 진입했다. 당국의 각종 호재성 정책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왔다. 수출 감소와 성장 둔화의 충격을 ‘증시 띄우기’와 내수로 완충하려는 중국 정부의 정책 노선이 작용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개인들은 돈을 빌려 주식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 7월 2000선에 머무르던 상하이 종합지수는 올 6월 5166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게 정점이었다. 펀더멘탈과 유리된 증시는 곧 거친 조정 국면을 맞았다. 이후 한달간 30%가 넘게 급락했다. 중국 당국은 강공책으로 응수했다. 상장기업의 절반이 거래가 정지됐고, 증시 안정기금이 대규모로 투입됐다. 하지만 반짝효과 뿐이었다. 당국이 시장과의 백병전에서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시장의 불안은 더 커졌고, 투매가 투매를 낳았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증시의 모습도 그랬다. 유가·물가·원화 가치가 모두 낮은 수준 ‘3저(低) 호황’에 연 10% 이상의 성장이 이어지면서 증권시장도 비약했다. 1989년 4월 1일 코스피 지수는 1000 고지를 넘어섰다. 1985년초 140에서 4년여만에 무려 622% 상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해 중반부터 증시에 이상 기류가 나타났다. 전국적인 노사분규와 물가 상승, 해외 통상압력 가중에 성장률이 둔화하면서 급격한 하락국면으로 빠졌다. 1991년에는 급기야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유가까지 급등하며 침체국면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거친 부양책이 동원됐다. 이른바 ‘조치의 시대’다. 3대 투신사(한국·대한·국민)에 무제한 주식을 매입하도록 한 1989년의 ‘12·12 조치’가 대표적이다. 정치적 배경의 조치들도 남발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나온‘2·20 조치’가 그 사례다. 효과가 단기적이었던 반면 부작용은 길었다. 부양에 동원된 투신사 경영이 부실해지자 정부는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빌려주는‘특융’을 하기도 했다. 한국 증시가 긴 조정기를 거쳐 다시 1000선을 회복한 건 1994년이었다. 하지만 1995년 母 증시는 하락세로 접어들었고 외환위기 폭락 사태를 맞아야 했다.
8일 기준으로 상하이 종합지수는 3170선까지 내려앉아 있다. 여전히 변동성이 큰 장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낙하 속도는 조금씩 줄어드는 분위기다. 눈길을 끄는 건 중국 당국의 대응 방식이 초기에 비해선 한결 ‘시장 친화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 투자자에 배당소득세를 면제해주고, 시장의 개혁개방을 추진하기로 한 건 본격적 체질 개선에 나서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시장의 급변동을 완화하는 장치로 주요 거래소들이 채택하고 있는 ‘서킷 브레이커’제도을 도입도 거론되고 있다. 한국에선 1998년 가격제한 폭을 늘리면서 보완장치로 도입됐다.
중국 증시의 상황을 꾸준히 모니터링해온 우리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중국 증시의 상승이 다소 과도했던 만큼 시기가 문제였을 뿐 조정은 불가피했던 상황이었다”며 “이를 인위적으로 틀어막으려는 대응 방식이 오히려 부작용을 키운 측면이 있고, 계단식 급락을 유발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증시의 성장 경로를 통해 본다면 중국이 취할 수 있는 다음 대응은 무엇일까. 거래소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가 8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중국 증시의 구조적 불안정 요인”이라면서 “중국대사관과의 만남에선 외국인 투자자의 참여를 넓히는 게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http://joongang.joins.com/article/780/18623780.html?ctg=1100&cloc=joongang|home|news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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